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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약에서 바울의 태도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예수 자신이 동성애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11)

고린토 전서 6:9, 디모데전서 1:10에 나타난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희랍어로 ‘Malakos’라는 뜻으로 문자 그대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다. 동성애로 번역된 말은 바울 자신이 희랍어로 사용한 ‘arsenokoitai’이다. 희랍어 ‘malakos’는 신약성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연약한으로’ 번역하지 않고 가끔 방탕한 음란한 뜻으로 사용한다. 만약에 우리가 ‘연약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로 썼다 할지라도 그것이 동성애자들만의 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해당하는 우리 말 뜻으로는 동성애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연약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에는 이성애자들도 포함된다.(12)

19세기 카톨릭에서는 ‘malakos’를 동성애와 관련해서 생각했다. 그 전에는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mastubation’(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성서 번역도 ‘malakos’를 동성애로 해석한 것은 원어인 희랍어와는 다른 해석인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서 희랍어 원전을 보면 동성애로 해석하고 있는 희랍어로 ‘arsenokoitai’도 동성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특히 바울이 사용한 말이다. 바울이 동성애에 해당하는 말을 희랍어로 찾아 쓸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인들은 동성애에 대한 사랑과 이성애에 대한 사랑을 배타적인 두개의 선택이나 근본적으로 다른 두개의 행동 유형으로 대립시키지 않았다.(13) 즉 그리스 문화는 동성애에 대해서 수용적이며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희랍어에서 얼마든지 동성애를 표현하는 말들을 바울이 찾을 수 있었다. 4세기에 성서가 라틴어로 번역되었을 때 ‘arsenokoitai’라는 말을 남창으로 번역하였다.(14) 다시 말하면 고전 6:9, 딤전 1:10에 나타난 동성애라는 언급이 원전의 의미와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있으므로 동성애를 의미하는 것인지 매춘인지 확실하지 않다.

로마서 1:18∼32은 인간의 갖가지 죄를 언급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한 죄를 강조하고 있다(22절). 주의해서 읽어보면 바울은 우리가 모든 만물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발 달린 짐승을 숭배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상들 때문에 사람들을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23절).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울 섬겼다는 이유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가 서로 ‘바른 관계’를 버리고 바르지 못한 관계로 욕정에 불탔으며(26절)로 표현되어 있으며 결국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 성서 본문에는 두 남성 혹은 여성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았다는 말이 전혀 없다. 이 본문에서 특히 우리는 세가지 관점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로마 기독교인들이 이교도 신앙의 영향 때문에 바울은 동성애의 표현으로 우상숭배의 결과라고 보았으나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둘째, 이 본문에서는 동성애의 열망을 내포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또 ‘서로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다’(25절). 그러나 이 말들의 내용속에는 서로 서로 인격적인 관계에서 형성되는 동성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바울이 한 말은 단순하다. 그는 이성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욕에 빠지는 것처럼 동성애를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성간의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로 해석하기 어렵다. 바울이 언급한 중요한 단어는 ‘바른 관계’, ‘바르지 못한 관계’라는 개념상의 문제다. 26절에 보면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바르지 못한 관계로 또 남자들도 이와 같이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영어에 해당하는 ‘natural(바른 관계)’을 아주 융통성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15)

로마서 2:14에서도 같은 희랍어 말을 쓴 ‘pushin’/‘natural’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에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실천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표준 새번역 성서에서는 희랍어에 해당하는 ‘pushin’ 영어로는 ‘natural’을 우리 말로는 ‘본성에 따라’라고 번역하고 있다.(16) 확실히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인간의 ‘본능에 따라’라는 의미 이상은 없다. 여기에서 바울은 사람의 ‘본성에 따라’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연법을 어긴 남성 혹은 여성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여성/남성의 동성애가 서로 좋아서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강요에 의해서 자연스럽지 못한 관계가 된다면 오히려 그 관계는 바른 관계가 아닌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오히려 동성간의 성의 관계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서로 깊은 애정과 매력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관계로 본다면 바울은 진실한 남성/여성의 동성애의 관계를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3. 성서의 性에 대한 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동성애에 대한 시각은 확실히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동성애에 느끼는 반감은 그것을 바른 관계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방종교문화가 유대생활에 침투한 것으로 반유대인으로 취급했다.(17) 그러나 이러한 결론이 오늘 동성애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의 해석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서에는 또다른 성에 대한 규범, 태도, 실행, 실천 그리고 금지 상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더 이상 규범이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성서의 성관계에 대한 태도를 몇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보겠다.

1) 나체:유대교에서는 가족들에게까지도 비난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18) 아들이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창 9:20∼27). 벗는다는 것이 부부관계에까지도 터부시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체의 해수욕장을 흔히 볼 수 없을지 몰라도 집안에서 문을 잠그고 부부가 벗는다 해서 죄라고 할 수 있는가?

2) 구약의 율법은 여자가 월경하는 동안 불결하기 때문에 여자에게 가까이 해서는 안되게 되었다. “그 여자가 불결한 기간에 눕는 자리를 앉는 자는 모두 부정하다.”는 것이다(레 18:19, 15:20∼23). 그리고 누구든지 이것을 범하면 그 대가를 받는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결별해야 한다. 오늘날 여성의 월경과 관계없이 성관계를 하기도 하고 그것을 부정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해서 그들이 죄인인가?

3) 성서는 서로 동의한 미혼 성인들 사이에 성관계를 금지한 곳은 없다. 결혼하지 않은 두 남녀의 관계를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아가서 1∼8).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비유적으로 해석을 해서 사랑의 장면을 은폐하려고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교회는 혼전/혼외 성관계를 금해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 독신자들, 과부나 이혼한 사람들이 옛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보면서 성관계는 결혼한 사람들에게만 속한 것으로 믿고 있다면 도대체 누가 옳은 태도인가?

4) 남성의 정액과 여성의 월경이 있는 동안 몸을 닿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월경하는 여자에게 닿는 남자는 모두 저녁때까지는 부정하고 그리고 남자가 정액을 흘렸음은 부정하다. 그 사람은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남자와 여자가 동침하다 정액을 쏟으면 저녁때까지 부정하다는 것이다. 여자의 몸에서 흐르는 월경이면 7일 동안 부정하다고 했다(레 15:16∼24). 지금도 정액이나 월경이 부정하다고 느끼는 청교도적인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다만 좀 지저분할 뿐이지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다.

5) 구약에서 간음, 근친상간, 강간, 매춘 등에 관한 사회 규범은 여성의 억압과 남성들의 재산권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여성은 남성의 재산권속에 속했다. 남성은 창녀집에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드나들었으며 미혼녀와의 관계는 그녀의 처녀성을 지켜준다는 의미에서 남성의 특권이었다. 창녀는 죄인으로 취급을 받을지라도 창녀를 찾아가는 남자는 죄책감이 없었다(창 38:12∼19, 수 2:1∼7).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여성들의 지휘가 향상되고 권리가 주장되는 사회로 발전하고 있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들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과 상호 존경심으로 남성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체제로 변모해 가고 있다. 훨씬 여권이 신장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 간음한 죄는 남성도 여성도 죽음의 형벌로 다스렸다(신 22:22). 한가지 다른 점은 여기서 남성의 경우 결혼한 여자를 상대했을때 간음죄로 정죄하지만 미혼여성과 성관계를 한 남성은 간음한 것이 아니다. 정을 통한 여자가 처녀가 아님이 증명되면 돌로 쳐서 죽이게 했다(신 22:13∼21). 여성의 순결에 대한 법은 모순성이 있다. 오늘날 소위 바람피는 남성들에게는 피임약의 발전이 아니었다면 미혼녀와의 관계에서 일부일처제를 고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현대에서는 유부녀보다는 처녀일 경우 문제가 심각할 수 있다.

7) 구약시대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신약시대에 바울은 감독 집사의 자격을 한 아내의 남편으로 일부일처제를 주장한다. 또한 이혼과 재혼을 금지했다(딤전 3:2, 12; 딛 1:6). 그러나 여전히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는 사회도 있지만 현대에 와서까지도 아프리카에서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다. 또 우리는 다시 한번 율법의 모순성을 발견한다.

8) 고대 이스라엘 유대교에서는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것은 결혼한 남자 형제 중에서 자식이 없이 죽으면 과부된 여인은 남은 다른 형제와 결혼해서 죽은 형제를 위한 씨받이가 되었다(신 25:5∼10). 예수께서도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고 있다(마 22:23∼33). 오늘날 이 해괴망측한 법규는 가정파괴 또는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된다.

9) 신약성서에서 바울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울 자신의 충고이지 주의 계명은 아니라고 했다(고전 7). 바울은 혼인에 관한 문제들을 여러가지 면에서 가르치고 있다. 전반적으로 성서는 남성 지배 문화의 가부장제를 규범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남성 우월주의의 가부장제는 우리를 영속시킬 수는 없다.

10) 유대인들은 12지파 안에서 동족결혼(근친결혼)이 허용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인종간의 결혼을 반대하였던 미국 남부에서는 동족결혼이 시작되고, 우리 사회에서도 동성동본 결혼을 허용할 조짐이 보인다. 인종간의 결혼이 금지되었으나 지금은 인종을 초월해서 국제결혼이 자유로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우리의 성의 형태도 급진적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경험한다.

11) 구약에서는 독신을 비정상적으로 여겼다. 예레미야에 대한 주님의 뜻으로 독신을 예고한 것은 이스라엘의 가족들을 위해서 불길한 징조 때문이었다(렘 16:1∼4). 바울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을 선호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교들과의 관계를 두려워해서 한 경고로 이해한다(딤전4:1∼3). 아직도 카톨릭 교회에서는 신부와 수녀는 독신을 정상으로 지키고 있다.

12) 성서는 또 다른 법을 제시하고 있다. “두남자가 싸울 때 한쪽 남자의 아내가 얻어맞는 남편을 도울 생각으로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음낭을 잡거든 너희는 여인의 손을 잘라라. 조금도 동정심을 가지지 말아라.”(신 25:11) 라고 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지금의 우리는 박수 갈채를 보낼 수도 있다.

신구약에서 노예제도는 정상적인 법이 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노예제도야말로 인간의 인권을 유린하는 악법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여성 노예신분/첩/여성을 성적 장난감으로서 또 남성은 성의 주체자로 여성은 성의 목적 대상으로만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여성은 노예신분인 낮은 인간이하로 취급했음을 우리는 구약성서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19) 이것은 마치 미국이 100년 이상을 노예제도 밑에 인권을 유린시킨 것과 같은 것이다.


4. 성서 권위의 문제

지금까지 논의된 여러 가지 성관계에 대한 사례들은 성서 권위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혼란과 이중성과 모순성을 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의 성생활을 이끌어 오는 법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어떤 법은 신약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변화를 볼 수 있다. 구약의 이러한 율법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복음이 아니라 율법 그 자체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하고 억압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새로운 법이 필요한 것이다. 아직도 살아 있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또 어떤 권위를 가지고 우리는 선택할 것인가?

우리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야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이롭게 해주시려고 율법의 맨 끝마침이 되셨다”(롬 10:4). 또 지금은 우리가 우리를 얽매였던 것에서 죽어서 율법에서 벗어났고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모든 성의 관습은 성령의 권위아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율법은 인간을 위해서 있어야지 인간이 그 법을 위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20)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법의 의미를 우리는 택할 수 없을 경우도 있다. 바울은 여성들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고 기도할 때 머리에 수건을 벗지 말라는 말을 함으로서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들의 기를 살려 놓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성서야말로 성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윤리만을 말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싶다. 그 사랑의 윤리는 어느 나라, 어느 문화, 어느 시대에도 변함없이 지배해오는 진실한 사랑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랑이란 약속, 믿음, 존경, 신뢰를 서로 할 수 있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性)을 단순한 동물적 본능의 발산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두 사람의 인간 관계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성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깊이 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율법의 시각에서 성을 볼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때 우리들의 왜곡된 사고는 전환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무엇이 허용되고 있느냐라는 질문보다는 내 이웃인 동성애자들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의 새로운 시각으로 본다면 성서가 무엇을 명령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기보다는 성서, 전통, 신학, 심리학, 인류학, 유전학 그리고 생물학 등등의 관점에서 지금 성령이 교회에게 말하려는 그 말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앞에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동성애를 잘못된 판단과 해석으로 정죄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동성애에 대한 성서의 부정적인 판단이 어느 때 가서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정죄라고 판단이 될 것으로 믿는다. 우리들은 성서의 동성애의 부정적인 측면은 마치 구약성서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구약성서의 어느 곳에서 노예제도를 부정의한 인권유린이라는 언급이 없었다. 오늘날 노예제도를 논의할 때 그 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또 성서는 여성은 언제나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졌던 유대문화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오늘날 인정할 수 있는가? 예수 자신이 간음한 사실을 제외하고는 이혼은 절대로 안된다고 가르쳤다. 오늘 우리들이 ‘절대 안된다’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절대의 진리로 지킬 수 있는가?


5. 인간의 편견

하나님은 약한자, 힘없는자 편에 계셔서 눌린자를 해방시켜 주시고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하시고 모든 만물을 화해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지금도 우리의 역사속에 살아 계셔서 우리를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기를 원하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를 구현하신 분이시다. 예수 자신이 동일시했던 세리, 창녀, 불구자, 병든자, 버림받은 사람이나 가난한 자와 함께 하셨다. 그는 인간이 어떤 위치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참 인간으로 인정해 주셨음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편견을 가지고 있다.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않고 옳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이성애만 옳다고 길들여진 사회 풍조에서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나와 생활양식이 다르다 해서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정죄할 수는 없다. 이성간의 성애가 옳다는 사고로 길들여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성애를 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정죄하는 것은 성서적 윤리의 정당성을 찾을 수 없다. 동성애가 잘못이라는 사고는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에서 오는 근본적인 태도와 같은 것으로 인간의 억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동성애와 이성애를 이렇게 비교하고 싶다. 이 세상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른손을 사용하는데 더 익숙하지만 왼손잡이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또 양손 모두 잘 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6. 끝내면서

필자는 성서에서 말하는 성에 대한 태도를 재조명해 봄으로서 인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필자는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단순히 동성간의 성적 흥미라든지 성적 행위로만 그들을 규정하고 싶지 않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갈망하는 두 인간(人間)간의 의미있고 뜻있는 관계의 형태로 보고 싶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늘어나고 있는 동성애자들을 정죄한다든지 은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동성애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삶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는 믿음을 통해서 그들을 향해서 우리들 자신을 활짝 열 필요가 있다. 또한 교회는 개방적으로 동성애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정죄할 수도 있고 금지할 수도 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인간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행위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을 어떤 행위로만 인정하고 정죄한다는 것은 하나의 인간에 대한 억압이며 정신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과 같고 도덕적 가치와 존경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사랑도 귀중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동성애는 또 하나의 다른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 동성애라는 개념은 이성애와는 다른 가치 부여에서 또 다른 깊은 인간 관계의 양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성성(Sexuality)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건전한 성은 통합을 향한 인간의 내적/외적 성장을 시켜준다는 것이다.(21)

하나님은 우리가 섬김속에서 동역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은 섬김이지 결코 동성애/이성애라는 성별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파트너쉽, 인간과 인간과의 파트너쉽, 인간과 자연과의 파트너쉽,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갖가지 파트너쉽을 주셔서 우리의 삶속에 살고 있는 관계를 지어주고 있다. 톰 드라이버(Tom Driver)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성에 의미를 논함에 있어서 다음에 취해야 할 단계는 종말론의 영역에 있다고 하겠다. “오랫동안 기독교 도덕주의자들이 성문제와 관련하여 물은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가?’였다. 그러나 성에 관하여 다른 모든 윤리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물어야 할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2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약은 민족적, 계급적, 인종적, 성적, 성적인 성향, 그 어떠한 경계라도 뚫고 나간다. 예수는 이러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억압과 편견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라 했다. 또 그러한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 해방자로 오셨다.

이제 우리는 동성애자들을 교회 밖의 사회 변두리로 소외시키기보다는 하나님의 샬롬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는데 우리 다같이 동역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참 고 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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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 한국여신학자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