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 자료사용에 관하여 주의 사항 이 자료는 동성애자 뿐 아니라 동성애와 동성애자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이성애자를 위하여, 우리사회에서 부당하게 억압받고 편견 속에서 소외 당하는 동성애자와 동성애에 대한 교육 자료 입니다. 동성애자와 동성애에 관한 모든 정보나 자료를 수록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만, 이제까지 갖고 있었던 편견과 잘못된 정보를 올바르게 잡을 수 있다면 작은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자 인권 연대는 진보적 입장에서, 한국 시민사회에서 가해지고 있는 모든 부당한 억압과 싸우는 전체 시민정치역량과 연대하여,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진행시키는 단체입니다.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만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인련 자료와 관련하여 본 자료는 동인련 편집팀이 신입교육자료로 준비한 것입니다. 이에 관한 저작권은 동성애자 인권연대에 있으며, 누구나 자료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사용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1. 과제물 제출을 위해 본 자료에 출처를 밝히지 않고 그대로 배껴쓰는 행위. 2. 출처를 밝히지 않고 토론회 및 세미나에 인용문구를 그대로 사용하는 행위. 3. 일간지 및 언론기관(학보사, 교지 등) 기자들이 동성애 관련 기사를 쓸때 인용문구를 첨부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쓴것 처럼 보도하는 행위. 자료를 퍼가실때는 사용목적과 함께 동인련 운영자에게 메일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5. 한국 동성애자의 역사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존재해 온 동성애자의 삶이 한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한국에서도 그 역사를 관통하면서 동성애자들이 살아왔고, 주요한 역사적 현장에서 자신들의 역할과 유산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동성애자 성정체성이 없던 시절. 특히 동성애를 이성애와 분리하지 않고,일반적 에로스의 한 부분으로 취급하거나,조금 기괴한 인물들의 일탈적 행위로만 취급했던 한국의 문화적 풍토에서 동성애자의 기록이나 삶을 추적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또 외국과 마찬가지로 여성들, 레즈비언의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과 논란 속에서도 여러 역사적 기록과 문학작품 속에서 우리는 한국 동성애자들의 삶의 아주 작은 조각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삶이 때로는 극적으로, 때로는 절망속에서 이어지고 결말 날지라도, 분명한 것은 동성애자들이 이 땅에서 분명히 존재했고 또한 그들의 힘들고도 아름다운 삶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l)동성애자 인권운동 이전의 한국 동성애자 한국에서 역사적 기록에 언급된 최초의 동성애자(또는 성적소수자)는 아마 신라 제 36대왕 혜공왕(758-780,재위 765-780)일 것이다. 그는 경덕왕의 적자로서,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태종무열왕의 직계손으로는 마지막 임금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을라, 태후가 초기에 섭정했다고 한다. 평소 여자 같이 행동하고 옷 입기를 즐겨하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원래 왕은 여자였는데 남자의 몸을 벌어 왕이 됐으니, 나라에 불길하다고 하여 죽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혜공왕은 여자같이 행동해서 즉 요즘 말로 근엄한 왕이 패곳처럼 굴어서 죽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즉 신라왕실이나 조정에서 동성애자 왕을 용납하지 못해서 왕을 살해한것은 아니었다. 태종무열왕 이후 신라 왕실은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전제 군주제를 꾀했고, 삼국통일의 명분 속에 오랫동안 짓눌려 지내던 귀족세력의 반격 속에 희생된 것이다. 혜공왕 이후 신라 왕실은 점차 기력을 잃고 쇠퇴일로를 걸으며, 지방권력과 장보고 같은 권신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혜공왕과 비슷한 말로를 보여준 임금은 고려시대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이다. 왕은 몽고 공주출신의 노국공주가 병사하자 큰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자제위라는 궁정 청년 근위대를 만들고. 그들과 동성애를 즐기다. 그 중 후궁 익비와 사통한 홍륜에게 죽임을 당한다. 왕이 궁정에서 여러 귀족 미남 청년들과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즐기고, 평소에도 여자 옷을 입고 치장하기를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공민왕의 비극이 그의 동성애 행위에서 일어난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가 동성애를 했다고 하여 조정 안팎에서 비난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자제위가 순전히 왕의 욕망만을 위해 만들어진 궁정 호스트들도 아니다. 후대 조선의 사가들이 부패한 고려 왕실의 필연적 멸망을 정당화 하기 위한 왜곡과 과장일 가능성이 크다. 자제위는 원·명 교체기에 반원기치를 높인 공민왕에 대한 친원파에 대한 방어적 목적과 북방수복의 원대한 꿈의 실현을 위한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어쨌거나 예술적 재능으로도 뛰어 났던 개혁군주 공민왕은 어이없게 자신이 쓰다듬어 준 한 청년의 손에, 술에 골아 떨어진 채 침실에서 비명횡사하고 만다. 그 외 공식적 기록에 남겨진 동성애자의 모습은 신라 원성왕대(785-798)에 묘정이라는 미소년의 얘기가 삼국유사에 나온다. 그는 용모가 출중하여나라 안팎에 소문과 칭찬이 자자했으며, 신라 고관들의 사량을 받았고 후에 당의 황실에 들어가 황제의 총애도 받았다고 전해진다. 또 조선실록에 세종기에 세자빈 봉씨가 자신을 돌보지 않는 세자의 처사에 분개하여, 후궁들과 오랫동안 동성애를 즐기다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세자가 돌보지 않아서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행위라기보다는 7년 넘게 지속 된 궁녀들과 그녀의 사랑은 분명 레즈비언적 행위였으며. 아마 그러한 그녀의 기질로 도리어 세자를 멀리 했을지도 모르겠다. 동성간의 사랑이 궁정이나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외 기록에는 남지는 않았으나 구전으로 전해진. 민간의 동성애 전통과 관련된 민담과 구전가요는 많이 있다. 우선 화량에 관한 이야기이다. 화랑은 삼국시대 이전, 부족공동체 사회에서부터 자생적으로 존재해 온 청년 조직을 후에 국가에서 인위적으로 재편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화랑을 우두머리로 하고 그를 따르는 낭도들로 구성되었는데, 세속오계로 대표되는 정신적 가치관 밑에서 강한 단체정신으로 여러 수련을 통해 심신을 단련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준 군사적 성격이 강한 화량의 우두머리를 굳이 꽃과 연계시킨 것은 처음 자생적 집단일 때 가장 아름다운 용모의 청년을 우두머리로 뽑았다고 전해진다. 또 몇몇 향가의 기록 속에 은근히 배어 나오는 낭도들간의 사량과 그리움의 감정 등을 감안했을 때. 화랑도에서 동성애적 행위와 사량은 꽤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일제 때 일본 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공식화하였으나, 우리 나라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화랑에서 남색의 행위는 부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유랑예인 집단 남사당과 그 외 승방과 머슴사이에서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의 사랑 얘기는 많이 전해진다. 문학작품에서 동성애의 감정을 기록한 것은 고려시대 경기체가 한림별곡에서, 미소년인 정소년과 관리인 시적 자아가 같이 그네를 타고 즐기며,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둘이서 손잡고 소풍을 가고 싶다고 애절하고도 낭만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또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청나라 상인들과 미소년들이 거래를 통해 동성애 행위를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부분은 중국 고전소설 홍루몽에서 미동들이 손님을 접대하는 술집 얘기로 뒷받침된다. 박지원도 청나라 문인들이 미소년을 추천하여, 은근히 중국의 동성애 풍습을 드러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조선의 선비이자 실학자인 박지원이 그러한 동성애 풍습이 좋다, 다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 게 더 재미있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와서는 홍명희의 [임거정]에 머슴들끼리의 남색 행위가 묘사되고 있으며, 그 외 현대 문학작품에서 동성애 묘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들이나 구전을 통해 우리 역사 속에서 동성애는 꽤 보편화된 삶의 일부분으로 절대 비난받거나, 처벌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공공연하게 동성애자의 정체성을 인식하거나,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여도 오늘날과 같은 도덕적 판단과 규제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세자빈 봉씨의 축출은, 그녀의 동성애적 행위보다는 왕실의 위엄과 세자와의 갈등 그리고 숨어 있는 정치적 알력의 영향이 더 강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중기까지 고관대작 대감들의 미동치기 관습은 꽤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유교적 도덕관념이 한국에서 동성애를 억압하는 주요한 장치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공자 ,맹자 생전은 물론이려니와 유교의 경전 격인 사서오경 어느 부분애도 동성애를 비난하는 내용은 없으며, 유학을 하는 선비들 사이에서 동성애적 감정은 일종의 사치이자, 유행 정도의 취급을 받았을 뿐이지 절대로 그것을 드러내어 자랑하거나 비난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한국에서의 전통적 동성애적 사랑과 행위의 관념은 해방 이후 서구의 문화, 특히 기독교 문화의 정착과 더불어 호모포비아적 태도가 동시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띄게 된다. 동성애에 대한 비난과 억압이 강해지자, 이젠 도리어 동성애자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며, 스스로 동성애자로 인식하고 자신의 권익과 친목을 다지는 모임도 생기게 된다. 최초의 동성애자 커뮤니티는 이태원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공식화된 모임은 아니지만 외국의 문물 특히 미국 문화의 영향 속에서. 비교적 개방적 생활태도의 유입과 전개가 가능한 이태원 지역에서, 동성애자들은 개인적이고도 개별적인 연결 관계를 맺고 서로의 어려움을 공유했을 것이다. 그리고 게이들을 중심으로 한 유흥 문화가 서서히 금호동, 약수동. 70년대말 종로지역, 그리고 이후 신당동 지역으로 확대, 정착되면서 90년대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바탕이 되는 공동체 문화와 지역적 바탕이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초기의 한국 동성애자의 모습은 오늘날 개념으로 완전한 자신의 성정체성을 가졌다고 볼 수 없으며, 오늘날 부정되거나 극복되어져야 할 여러 분리적, 순응적 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와 문화야말로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그후 공식화된 모임으로는 1960년대 조직된 여운희(여자 운전사회)가 비록 레즈비언 조직은 아니지만, 회원의 상당수가 실질적 레즈비언들로서 거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으로 특히 성적 소수자로서 자신을 개척해 나가야 되는 여성들에게 힘이 되었다. 또 80년대 후반부터 국내 거주 외국인 레즈비언 조직인 사포를 중심으로 점점 조직화의 모습을 보여 준 국내 동성애자들은, 드디어 처음으로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목적으로 남녀 동성애자 모임 [초동회]가 1993년 겨울에 조직되었고, 곧 남성 동성애자 모임 [친구사이], 여성 동성애자 모임 [끼리끼리]의 발족으로 이어진다. 2) 동성애자 인권운동 이후의 한국의 동성애자 한국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적 기반이 매우 얕다. 한국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은 진행되었지만 그것은 서구의 전(全)사회적인 억압과는 분명히 다르다. 한국에서 억압은 가정을 통해, 우회적 교육을 통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는 운동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개인적인 삶에서의 한탄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동성애자들이 조직되기 시작한 직접적인 원인은 동성애자에 대한 에이즈 탄압이었다. 한국의 경우. 아직까지도 동성애자를 직접적으로 탄압하는 법률은 없다. 또한 동성애자가 부당하게 탄압 받았을 때, 이를 구제하는 법률 또한 없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과 운동의 필요성과 명분이 약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은 매우 견고하다. 한국은 전사회적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이 묵인되고 있으며, 이는 정부의 정책, 언론, 교육, 가정 등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3년을 즈음하여 지식인들 사이에서 동성애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초기 동성애자 인권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오늘날 동성애자들이 접할 수 있는 인권 단체, 문화운동 단체, 친목 단체, 사이버 모임 등, 크고 작은 단체가 100여 개가 넘게 있는 것으로 본다면 동성애자 인권 운동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두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진보적인 운동세력들이 미비하며, 운동 자체에 대한 체계적인 고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동성애자 운동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는 97년 노동자 총파업에의 결합으로 인한 운동의 가시성 확보와 국가 인권위원회 문제에 대한 대응, 에이즈 정책과 에이즈에 대한 의식 변화, 그리고 동성애자들의 자아 정체성확립 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노동자 총파업에의 결합과 인권위원회문제에 대한 대응은,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문제에 국한해 소극적으로 개입해 오던 기존의 운동 방식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높이 살만하다. 한국에서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성장이 뒷받침되지 아니한 상태에서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시작되었다. . 그러나 한국의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이 사회의 다른 운동세력들과 연대를 진행해 온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기 힘든 운동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 동성애자 운동은 한국 사회운동의 전통 선상에 서 있으며, 발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한국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현안 동성애자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은 여러 부분에서 동성애자 개인들의 심리적 부적응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매우 미비하다. 일부 동성애자 인권단체들이 이러한 노력을 진행하고 있으나 역부족이다. 또한 성문제를 상담하는 정부, 비정부기구들도 동성애자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소양이 전무한 상태이며, 심지어 어떤 상담자들은 자의적인 윤리 판단을 상담에 개입시키기도 한다. 공교육에서 동성애자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몇몇 언급된 경우에도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다루어진다. 공교육의 이러한 측면은, 가정이나 교우 관계에서의 소외 등과 더불어 동성애자 청소년의 가출을 부추기고 학업 중퇴율과 자살율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 군대와 감옥은 이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장소이다. 이 공간들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멸시가 다른 곳들에 비해 더욱 공공연하게 이루어질 뿐 아니라 인권침해 행위에 대한 구제 조치가 진행되기 매우 힘들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권위원회의 설치는 한국의 인권, 사회단체들의 가장 긴급한 현안이며, 이는 동성애자 단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법무부가 주도하고 있는 인권법안(법무부의 국가인권위원회의 설치법안에 대한 명칭)에는 인권침해 구제대상을 여덟 가지로 한정짓고 있는데, 동성애자 단체들의 주된 주장은 동성애 둥의 성적 지향에 의한 차별을 구제대상에 포함시키고. 아울러 구제대상을 한정적으로 열거하지 말라는 것이다. 앞서 열거한 문제들 이외에도 동성애자들의 현안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동성애자 업소에 대한 침탈. 가족제도 문제, 언론 문제 둥이 그것이다. 또한 동성애자에 대한 해고, 법적인 불이익. 우익집단의 테러 등의 문제가 조만간 불거질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에서는 동성애자 운동이 커뮤니티의 성장보다 먼저 이루어졌다. 이는 동성애자 운동을 지지할 대중들과, 동성애자 개개인들의 생활을 지지할 기반이 약하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현재의 음성적 커뮤니티는 동성애자들간의 바람직한 관계 맺음을 저해할 수 있으며, 동성애자 인권 운동에 대한 지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모든 현안들을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측면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이 지렛대가 되어 동성애자 개개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으로 살아갈 때, 모든 부정적인 억압에 대한 저항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단순히 문화적, 도덕적 측면의 동성애자 운동은 억압의 강도를 벗겨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억압의 구조는 더 견고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동성애자의 문제도 정치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동성애자들에게 던져진 최대의 현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