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넛(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제작년 5월호 웹진에 퀴어 코드가 있는 케이팝 곡들에 대한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당시 곡을 고르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가사나 뮤직비디오에 퀴어한 요소가 들어간 곡들이,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아직까지 보수적인 한국 사회의 정서상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거다. 그래도 최소 앨라이로서 목소리를 내며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대한 연대의 뜻을 보이는 케이팝 아티스트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다. 아무튼 이번 글에서는 케이팝 아티스트가 아닌 케이팝 팬덤이 퀴어함을 다루는 여러 가지 형태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다.
퀴어 당사자이자 다양한 케이팝을 향유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아티스트의 언행이나 음악에서 퀴어 친화적인, 혹은 퀴어적인 요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모든 케이팝 팬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같은 그룹의 멤버들끼리 커플링을 만들어서 팬픽을 쓰는 수많은 팬들 중에서도 팬픽 텍스트가 아닌 현실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언급을 보는 것, 혹은 성소수자 팬들이 퀴어함을 드러내며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케이팝 팬들의 이런 행태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 전에 있었기에, 이에 대해 이야기하며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케이팝 덕질을 한다는 것의 양면성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혹시나 몰라서 그룹명을 명시하지는 않겠지만, 입덕한 지 이제 1년이 훌쩍 넘어가는 모 남자 아이돌 그룹이 있다. 소위 5세대 아이돌이라고 분류되는, 연차가 얼마 되지 않은 그룹이다. 이들에 대한 자랑을 하라면 두 시간도 떠들 자신이 있다. 노래면 노래, 랩이면 랩, 춤이면 춤, 작사면 작사, 뭐 하나 실력이 빠지지 않는 그룹이다. 무대에 설 때 가장 행복해 보이고 춤과 노래를 연습하며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에 진정으로 열정을 보인다. 오랜만에 남자 아이돌 판에서 청량 컨셉으로 데뷔하여 대히트를 치고 나서도 음원차트와 음악방송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이고, 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도 어찌나 예쁘게 하는지. 유료 멤버십도 가입해 2년째 갱신 중이고, 역대급으로 구린 디자인의 응원봉도 5만원 가까이 되는 가격에 구입해서 멤버들을 실제로 볼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출퇴근이나 구직 등 지치고 우울해지는 일상을 보내다가 이들의 무대 영상, 자컨, 라이브 방송 영상을 보고 다시 조금 더 힘을 내서 살아갈 용기와 위로를 얻기도 한다. 팬미팅 예매가 열리는 날에는 예매 시작 시각 한시간 반 전부터 PC방에서 대기했지만 결국 화려하게 실패했다. 게이답게 충실히 걸그룹 노래만 듣다가 이들을 보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위 말하는 ‘덕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아무튼 그 정도로 내가 아끼는, 사랑할 만한 그룹이라는 이야기이다.
여초가 당연시되는 남자 아이돌 팬덤 중에서 손꼽히게 남성 팬 비율이 높은 그룹이기도 하다. 티켓 판매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콘서트 예매 성비를 보면 보이그룹 중에는 거의 유일하게 남성 비율이 10퍼센트를 넘는다. 유튜브를 보면 ‘형’이나 ‘삼촌’을 자칭하는 팬들이 많고, 유명한 팬 유튜버들 중에는 남성 팬도 있다. 애초부터 팬덤이 다른 보이그룹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퀴어 팬들도 많다. 남성 스펙트럼의 퀴어뿐 아니라, 여러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의 퀴어들이 팬덤에 적지 않은 비율로 존재한다. X(구 트위터)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각 잡고 하는 아이돌 덕질이어서 그런가, 원래 이렇게 다양한 퀴어 팬들이 아이돌 팬덤 내에서 가시화되었는지 몰랐고, 신기했다. 어쩌다 보니 트위터에서도 알게 되고, 실제로도 집회 등 여러 현장에서 만나게 된 해당 그룹의 퀴어 팬들과 단톡방을 만들어서 덕질 얘기를 하게 되었다. 소중한 톡방이다. 남성 팬들이 모여 있는 오픈채팅방도 들어가 있지만 여러 가지 혐오와 빻은 발언들이 이따금씩 난무해 마음 편히 얘기하기도 뭣하다. 이 톡방에서는 퀴어인 것을 숨기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 빻은 말을 하면 어쩌나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서 덕질 얘기만 하루 종일 할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퀴어 지인들이 있다는 것은 참 든든하다.
작년 말경, 이 톡방에서 한창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삘을 받고 추진한 (약간 대형)프로젝트가 있다. 해당 그룹의 퀴어와 앨라이 팬의 이름으로 모금을 해서, 그룹의 데뷔 2주년에 맞추어 한국성소수자인권단체연합 무지개행동에 기부하는 것이다. 트위터에는 비슷한 방식으로 모금해서 기부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퀴어 팬덤이 많이 있는데, 퀴어 비율이 이렇게 높은 이 팬덤에서 그런 것 하나 안 나오면 되겠나 싶었다. 톡방에서 두어 명의 뜻이 있는 멤버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트위터와 인스타 계정을 새로 파고, 구체적인 모금 타임라인 및 홍보 방법, 트위터 재게시 및 인스타 스토리 공유 이벤트를 구상하고, 디자인을 할 줄 아는 인원이 웹자보와 로고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야심차게 프로젝트를 처음으로 온라인상에 공개하자, 여러 면에서 반응이 뜨거웠다. 사실 예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해당 그룹의 팬층 중에 이들의 노래를 퀴어 코드로 해석하거나 퀴어 팬덤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 소위 말해 ‘퀴어 묻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이들의 악플과 사이버 불링에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말자고 혼자서 다짐도 했지만 막상 이런 댓글을 마주하니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ㅈㄹ을…’, ‘ㅅㅂ’, ‘덕질할 때는 덕질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왜 퀴어는 아이돌 팬덤에 탑승하려고 그럴까요?’, ‘ㅈㄴ ㅈㄹ 그만해라’, ‘한남 똥게이 니네끼리 해’(심지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원이 모두 게이인 것도 아니었다!)와 같이 원색적인 비난이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팬들의 공개 및 비공계 계정을 메웠다.
물론 악플만 달린 것은 아니었다. 알페스는 잘만 쓰면서 퀴어 팬덤이 드러나는 것은 싫어하는 팬들의 위선을 꼬집는 댓글부터 악플 달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댓글, 우리를 응원하는 댓글 등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모금 프로젝트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유사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이 있는 다른 아이돌의 퀴어 팬덤 계정을 트위터에서 찾아보았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케이팝 퀴어 팬들이 모인 계정의 상당수가 여러 가지 이유로 201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 초 사이에 활동의 동력을 잃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활동을 이어가는 모 걸그룹의 퀴어 팬덤 계정, 그리고 해외 팬들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모 보이그룹의 퀴어 팬덤 계정의 관리자들과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케이팝 퀴어 팬덤이 가시화되는 것에 환영의 뜻을 보이며, 계정 운영과 프로젝트 진행 등에 대한 조언을 나누고 프로젝트를 각자의 계정으로 홍보해 주었다.
결론적으로 목표한 금액을 모으는 것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목표액의 대략 2/3정도 되는 금액을 모을 수 있었고 해당 그룹의 데뷔 2주년 당일에 이 금액을 무지개행동에 송금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금에 참여해 주었다. 실명을 밝히지 않고 그룹의 팬 이름으로 송금한 사람도 있었고, 다른 케이팝 아티스트의 팬들이 후원으로 연대해 주기도 했다. 응원하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퀴어 팬들에 대한 혐오의 글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케이팝은 가사에 퀴어 코드가 없더라도, 작사 작곡가나 가수가 퀴어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퀴어 커뮤니티와 결코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연결성을 지닌다. 보깅이나 왁킹과 같이 케이팝 안무에 자주 활용되는 춤들, 그리고 하우스나 디스코와 같이 케이팝 작곡에 활용되는 음악 장르들은 퀴어 커뮤니티에서 만들고 향유한 것들이다.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소수자들이 만들고 향유한 예술은 시간이 흘러서 주류 케이팝에 녹아들었고, 케이팝 팬들 중 상당수는 이러한 유산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케이팝이 어느 면에서든 퀴어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퀴어들의 예술을 사용해 만든 케이팝을, 현재는 전 세계의 퀴어들이 보고 들으며 가사에 공감하고, 자신을 더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위로를 얻는다. 알페스를 쓰면서 정작 퀴어 팬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아이돌 그룹에 퀴어를 ‘묻히는’ 것 같아 보여서 배척하려 하는 팬들은 케이팝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케이팝이라는 넓은 장르의 음악을 창조하고 공연하는 아티스트는 이미 어느 정도 ‘퀴어함’을 수행하는 스펙트럼에 들어 있다. 어쩌면 스스로의 퀴어함을 숨기지 않으며 팬덤 활동을 하는 이들이 케이팝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는 것이겠다.
개인적으로 모금 프로젝트는 여러 모로 좋은 경험이었고, 해당 아티스트의 팬덤에서 처음으로 퀴어와 앨라이가 모여 진행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홍보 부족 등의 여러 이유로 목표한 금액을 모으지 못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내가 좋아하고 위로를 얻는 케이팝 아티스트의 퀴어 팬덤에서의 프로젝트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앞으로도 같은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퀴어들과 함께 퀴어 팬덤을 온라인, 오프라인상에서 마음껏 가시화하며 즐거운 덕질 생활을 이어 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