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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에세이] 마라톤과 상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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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 (행성인 HIV/AIDS인권팀)

한쪽 무릎이 점점 아파왔다. 아마 며칠 전부터 아팠던 것 같다. 아, 어제 노동절 집회도 한 바퀴를 쭉 걸었지. 그런데 뛰고 있다. 10km 중 얼마나 남았을까. 그나저나.. 나는 왜 뛰고 있지. 맞다, 내가 신청했지. 가슴팍에 ‘동성결혼’이라고 큼직하게 붙이고 뛰는 사람들이 앞에서 옆에서 보인다. 그 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다. 그리고 그 슬로건은 내 옷에도 붙어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연애와 결혼은 내 삶에 없는/없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언까진 아니어도 주위에 비슷한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하루에 결혼과 연루된 두 가지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나는 ‘동성결혼’을 가슴팍에 붙이고 10km 달리기, 하나는 친동생의 이성결혼 상견례. 이 글은 그 하루를 복기하는 글이다.

​올해 초에 ‘모두의 결혼’에서 5월에 있을 여성마라톤에서 같이 뛸 크루를 모집하는 공지를 보았다. 2년 전에 한번 10km 대회를 달린 경험이 있어서 자신 있게 10km를 신청했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운동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했겠지. 몇 달 뒤 상태 쯤은 고려하지 않고 말이다.

아무튼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동생의 결혼 소식도 그 즈음에 들었다.

​원래도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가족을 통해서 요즘 만나는 사람이 있다더라 정도만 전해 들었는데 어느새 그렇게 되었다더라. 삶에 등장할 줄 몰랐던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바로 상견례.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다. 보통 한정식집, 스시집, 어떨 때는 돈가스 가게 PPL을 배경으로 정장을 챙겨 입고 분명 식당인데 아무도 음식엔 손도 대지 않는 그런 장면. 기괴한 정상성으로 가득한 공간에 가야한다는 생각에 아득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더 비정상으로 살았어야 이런 곳에 초대 받지 않았을텐데, 생각마저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 정상사회 일원들에게 넌지시 “동생이 결혼하는데 상견례에 꼭 가야하나?” 물어봤다. 모두가 짠 것처럼 ‘당연히 가야지 그런 걸 왜 물어보지?’ 했을 때 보통의 핑계로는 뺄 수 없음을 알았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대회장에 간다. 무사히 뛰고 근처 사우나에서 땀을 씻고 가면 점심 일정도 늦지 않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저녁에도 모임이 있는데. 오늘도 되새긴다, 일정은 테트리스가 아니다.

아무튼 정신 차려보니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가슴팍에 붙은 ‘동성결혼’ 네 글자가 바람을 맞아 펄럭였다. 땀이 눈을 찔러 따가웠고, 무릎은 정직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법 제정을 외치며 달리는 이 활기차고 요란한 에너지가 어쩐지 생경했다. 남들 다 하는 권리를 달라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숨이 차고 무릎이 아파야 하는 걸까. 결승선이 보일 때 즈음엔 이미 정신이 혼미했다. 기록이고 뭐고, 머릿속엔 오직 ‘사우나, 정장,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서도 시계만 쳐다봤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도착한 상견례 현장은 예상하던 풍경 그대로였다.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 양가 어른들의 대화는 마치 잘 짜인 연극 대본처럼 조심스러웠다. 덕담을 가장한 탐색전, 어색한 웃음소리. 이 좁은 공간을 채운 정상성의 무게에 불편한 정도는 각자 달랐겠지만, 그 누구도 즐겁거나 편하지는 않았으리라.

문득 몇 시간 전, 가슴에 동성결혼을 붙이고 땀 흘리며 달리던 현장이 떠올랐다. 결혼하고 싶은 퀴어들이 바라는 것이 정녕 이 숨 막히는 정상성의 의례인가… 틀린 생각이길 바란다. 이들이 원하는 결혼과 내 눈앞에 펼쳐지는 정상적인 결합은 어디까지 다르고 같을까. 목을 축이려 뜬 숟가락의 국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글 내용을 참고해 필자의 허락을 받아 AI로 이미지를 생성해보았다. 이미지 자체는 글쓴이와 무관함(편집자)

​모든 일정이 끝나고 (무려 이 날에 3개의 일정이 있었다) 활동하는 감염인 커뮤니티의 모임이 있어서 사무실로 향했다.

익숙한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답답한 긴바지와 흰 셔츠를 벗었다. 비로소 팽팽했던 긴장이 탁 풀렸다. 마라톤의 육체적 피로와 상견례의 정신적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늘 하던 이야기와 농담을 나누다 보니 묘한 해방감이 들었다.

​하루동안 서로 다른 세계를 횡단했다. 동성혼 법 제정을 요구하며 거리를 달렸지만, 정상성의 무게로 짓눌린 한정식집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질병과 낙인을 공유하며 서로를 지탱하는 커뮤니티의 사무실까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 개의 퍼즐 조각을 나의 하루에 억지로 끼워 맞춘 기분이었다.

​결혼이 삶에 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동성결혼을 위해 달리고, 이성결혼의 통과의례에 참석해 침묵을 지키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맥락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이 피곤한 하루가 그저 신기했다. 욱신거리는 무릎을 주무르며 잔에 소주를 채웠다. 한입에 털어넣으며 생각했다. 음 결혼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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