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 자료사용에 관하여 주의 사항 이 자료는 동성애자 뿐 아니라 동성애와 동성애자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이성애자를 위하여, 우리사회에서 부당하게 억압받고 편견 속에서 소외 당하는 동성애자와 동성애에 대한 교육 자료 입니다. 동성애자와 동성애에 관한 모든 정보나 자료를 수록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만, 이제까지 갖고 있었던 편견과 잘못된 정보를 올바르게 잡을 수 있다면 작은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자 인권 연대는 진보적 입장에서, 한국 시민사회에서 가해지고 있는 모든 부당한 억압과 싸우는 전체 시민정치역량과 연대하여,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진행시키는 단체입니다.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만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인련 자료와 관련하여 본 자료는 동인련 편집팀이 신입교육자료로 준비한 것입니다. 이에 관한 저작권은 동성애자 인권연대에 있으며, 누구나 자료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사용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1. 과제물 제출을 위해 본 자료에 출처를 밝히지 않고 그대로 배껴쓰는 행위. 2. 출처를 밝히지 않고 토론회 및 세미나에 인용문구를 그대로 사용하는 행위. 3. 일간지 및 언론기관(학보사, 교지 등) 기자들이 동성애 관련 기사를 쓸때 인용문구를 첨부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쓴것 처럼 보도하는 행위. 자료를 퍼가실때는 사용목적과 함께 동인련 운영자에게 메일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7. 동성애자로 살아가기 1) 커밍아웃, 가족, 친구 커밍아웃이란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긍정하고 이를 타인에게 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커밍아웃은 동성애자가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동성애자로서 살아가기 위한 기반이며, 이는 동성애자 자신에게 매우 큰 심리적 안정을 줍니다. 물론 커밍아웃은 많이 이루어질수록 좋습니다. 그것은 동성애자 자신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나, 동성애자 전체를 위해서나 매우 좋은 상황을 만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동성애자 자신이 지금까지 철저히 이성애자로써 살아 왔기 때문에 커밍아웃이 꺼려지거나 두려운 것 뿐만이 아니라, 커밍아웃을 하게 되므로서, 발생하는 불이익입니다. 정서적인, 그리고 실제적인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커밍아웃이란 것이 분명 필요하고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섣불리 커밍아웃하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커밍아웃이란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작은 부분에서 개인의 희생을 종용하는 것이 아니라, 커밍아웃을 했을 때 주어지는 불이익이나 소외를 없애는 것입니다. 현재의 사회는 가족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족으로부터 소외되었을 때, 우리의 심리적 안정은 물론, 경제적인 부분까지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가족들은 매우 힘든 과정을 거치지만, 대부분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가족이 정서적으로 매우 밀접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에 대한 커밍아웃은 상대적으로 많은 이익이 걸려 있지는 않습니다. 친구들로부터 소외될 것을 걱정하기도 하겠지만,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충분히 해결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들 중 몇몇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충분히 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가능하지 않다면, 과감히 그 친구를 버릴 필요도 있습니다. 동성애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성애자로서 사회에 순응하며 사는 것보다는 매우 힘들 수 있습니다. 동성애자에게는 어떠한 제도적 장치도 없고, 또한 현재로서는 함께 생활 할 수 있는 공동체도 제대로 있지 않으니까요. 우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주위에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동성애자 친구들을 계속 사귀어 가는 것입니다. 파트너와 동성애자 가족을 이루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속적인 파트너쉽을 원한다거나, 배타적인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동성애자 커플을 구속할 제도적 규정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며-물론, 그러한 제도적 장치를 새로이 만들어 동성애자 커플을 묶어두자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위해서나, 파트너를 위해서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보다 올바른 방법은 동지애적인 입장에서 만들어진 공동체의 조직과, 그 안에서의 열린 파트너 관계일 것입니다. 2) 성적 순결, 낭만적 사랑, 파트너와 함께 성적인 순결, 또는 순종은 오래동안 내려온 사상입니다. 그것은 동성애자를 억압하는 가장 직접적인 기반인 가족의 유지를 위해 만들어졌고, 또한 그렇게 쓰이고 있습니다. 가족의 유지에 있어서 성적인 순종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은 부자상속에 기반한 사유재산의 유지와 자본의 계승 확대에 필수적입니다. 요컨대, 성적 순종의 제도는 이성애 관계를 기반으로 한 일부일처 가족제도의 유지를 의해 만들어진 허위의식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순결 이데올로기라 부릅니다. 여기서 순결이란, 일부일처제의 결혼 안에서를 제외한 모든 성적 관계를 배제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순결 이데올로기는 이 사회의 모든 이의 성적 자율권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이는 동성애자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강화하고, 또한 동성애자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동성애자는 파트너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즉, 자신의 성적 자율권을 행사한다는 이유로도 비난 받습니다. (물론 우리가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자정(?)을 외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 앞서 그것이 과연 동성애자들의 인권에 도움을 주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성적으로 자유로운 이들에 대한 공격이 결국에는 동성애자 전반에 대한 공격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반순결주의란 바로 이 부분에서 출발합니다. 반순결주의란 동성애자 억압의 기반인 가족제도의 유지를 위한 순결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생활에서 파트너에 대한 성적인 순종을 강요하지 않고, 영속적인 관계를 강제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요컨대, 반순결주의는 파트너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순결 이데올로기라는 억압의 제도에 반대한다는 것이고, 아울러 배타적인 성적 관계를 배격하고, 상대와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 열려진 파트너쉽을 맺어 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동성애자는 이성애자로서만 교육되어 왔습니다. 이는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의 모델을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하며, 또한 동성애자들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또는 자신을 억압하게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순결주의는 이성애자들을 강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그런데,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와 다른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상, 동성애자도 이러한 이데올로기에서 마찬가지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동성애자라는 상황이 동성애자로서의 올바른 정체성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낭만적 사랑은 성적 순결의식과 맞물려 존재합니다. 그것은 파트너에 대한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그런데 근대이후 낭만적 사랑은 끊임없이 유포되기 시작했고, 각종 매체를 통해, 우리의 뇌리 속에 너무나 확고히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낭만적 사랑의 최대 목표는 공인된 영속적 관계인 결혼으로 생각되기 시작했고, 이는 많은 이들에게 심지어 우리 동성애자들에게까지 하나의 이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낭만적 사랑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한 생각입니다. 관념이란 것은 어떠한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관념은 성적 순종을 강요하고, 파트너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강요를 만들어 냅니다. 낭만적 사랑은 일종의 관념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조작되어 유포되는 '진실'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자리, 우리가 그동안 낭만적 사랑이라는 관념으로 채워왔던 그 자리를 메워야 할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아마도 '우애'나 '친밀감'이라는 것들이 적합할 것입니다. 위의 것들을 받아들인다면, 파트너와 괴롭지 않게, 그리고 파트너를 괴롭히지 않고 사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파트너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보다 많은 예의와 이해가 필요하겠지만. 파트너에 대해 지금까지의 제도적 관습에 의한 강요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파트너를 위해서 중요합니다. 열린 관계란 자신과 파트너의 자율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모든 관계에 있어서 노력을 아끼지 않을 필요는 있지만, 노력을 기울이기 전에 그 노력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3) 성역할의 구분 동성애자들의 성행위에서의 역할은 완전히 구분되어지지는 않습니다. 일부는 고정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많은 수는 양쪽의 역할을 번갈아가면서 합니다. 펨과 부치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원래 레즈비언들의 스타일에 대한 용어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성행위에서의 역할을 구분짓는 말로써 주로 쓰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게이들 사이에서는 (어원을 알기 힘든) 마짜와 떼짜란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두가지 모두 성행위에서의 역할을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이 이성애적인 모델을 상정해서가 아닌, 단순한 개인적인 선호에 따른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 이는 전혀 문제시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구분이 단순한 성행위에서의 선호에 따른 역할 구분으로 쓰이지만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때로는 동성애자 내에서의 성행위의 역할 구분이 이성애자들 사이에서처럼 남성대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남성대 여성으로 자신들을 규정짓고, 그에 따라 여성이라 생각되는 역할을 하는 이가 능동적인 성의 주체로서 서는 것을 거부한다거나 (또는 스스로 그러하지 않으려고 한다거나) 남성역인 이가 자신을 파트너보다 우위에 두고 생각한다거나, 일종의 멸시를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원인은 이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지 않은 것과, 동성애자가 이성애 관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모델로 삼는 것입니다. 요컨대, 선호에 의한 성행위에서의 역할 구분은 경우에 따라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구분에 그쳐야 하는 것이지, 억지로 우리를 규정짓는다거나, 파트너와 또다른 권력관계를 만드는 데에 쓰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울러 억지로 여성스러워지려고 한다거나 남성스러워지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녀라는 성별이 여성다움이나 남성다움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며, 동성애라는 성향이 여성을 남성답게 하거나, 남성을 여성답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이 형성되는 것은 교육과 (성별과 성향에 관계 없는) 개인적 선호에 의해서입니다. 모든 이가 그러해야 하겠지만 특히, 동성애자들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으로부터 자유로와질 필요가 있습니다. 4) 성행위, Hot sex, Safe sex 성행위란 정의내리기가 매우 힘듭니다. 개인에 따라 오럴섹스를 성행위라 하기도 하고, 페팅-물론 페팅에 대한 정의도 매우 다양하지만-을 성행위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부 게이들은 애널섹스(항문성교)만을 성행위라고 규정짓습니다. 말하자면, 성행위를 규정짓는다는 것은 자신에게만 유효한 작업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가장 일반적인 성행위의 개념인 '오르가즘에 이르기 위한 모든 행위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성행위에 대한 기존의 정의(주로 삽입성교 중심주의)에서 탈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존의 성행위에 대한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들을 스스로 강요할지도 모릅니다. 어떤 레즈비언들은 원하지도 않으면서, 질에 손가락을 넣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어떤 게이들은 원하지도 않는 항문 성교를 고통스럽게 '즐겨야'할 것입니다. 왜곡된 이성애적 성행위의 모델을 자신에게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이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성행위가 있습니다. 이성애의 성행위가, 심지어 이성애자들조차 모두 좋아하는 것은 아닌 성행위가 동성애자들의 모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행위를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첫째, 자신의 오르가즘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대부분은 자신이 어떠한 것을 좋아하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가 성에 대해 매우 적은 교육, 그것도 '생명의 신비' 따위의 내용만을 배웠기 때문이고, 또한 그밖의 정보들은 매우 관념적인 '신념'이나, 왜곡된 사실들로부터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오르가즘에 대한 판단은 정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하는 것입니다. 성행위에 있어서 정신적 교감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념에 근거한 오르가즘은 성행위를 즐거움의 대상이 아닌 의무와 의식의 대상으로 묶어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오르가즘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관념적 오르가즘이라는 환상에서의 틸피입니다. 둘째, 성행위라는 것에 대한 의식적인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행위를 무언가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교육받아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별 성행위들에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해 왔고, '완전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관계들을 배제시키거나 평가절하하도록 만들었으며, 파트너와의 성행위를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성행위는 친밀함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인간관계의 다양한 매개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따라서 그에 대해 두려움을 갖거나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셋째, 상대방과 원하는 행위를 조율하고, 현재의 성행위에 대해 어떠한 의미를 두고 있는지를 서로 확인하고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행위에 있어서도 대화는 필수적입니다. 그것은 서로의 오해와 불만족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안전한 성행위를 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명확한 거부 등이 필요합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애정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일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안전한 성행위(safe sex)라는 것을 포함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신체를 안전하게 지켜줄 뿐만 아니라, 성행위에 있어서의 두려움을 상당 부분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전한 성행위는 모든 성행위에 있어 필수적입니다. 이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입니다. 안전한 성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감염되거나 발병할 수 있는 질병은 에이즈 뿐만이 아니라, 유방암과 매독 기타의 성병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고정된 파트너가 있을 때, 안전한 성행위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에 있어서도 안전한 성행위는 필요합니다. 각종 질병들은 신뢰가 막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에이즈라는 마녀사냥의 도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이즈는 윤리적 판단을 하지 않는 바이러스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저주를 퍼붓기 위해, 열심히 동성애자를 찾아내, 동성애자만에게만 선별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동성애적 성행위와 에이즈가 무관하다는 판단을 한 후, 다 나아가 에이즈라는 것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를 숙지하고, 이를 역이용해야 할 것입니다. 에이즈란 것은 우리에게 또다른 좋은 사회적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AIDS와 HIV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기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왔다고 해서 감기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HIV에 감염되었다 해서 에이즈가 발병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발병했다 하더라도 모두 사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HIV 감염자들에 대한 배려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HIV 감염자들을 보호하고, 이들과 연대하므로써, 에이즈에 대한 투쟁을 더욱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이즈 치료제는 조만간 개발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개발비용을 이윤추구가 목적인 제약회사가 부담함에 따라 개발후 의료비 부담은 지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따라서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질병 치료도 계급적 차별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거기에다 동성애자의 병이란 편견까지 덧붙여져서 말입니다. 따라서 정부는 지금이라도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에이즈 치료 및 예방과 감염자와 환자에 대한 적절한 처우와 대책에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