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넛 (행성인 HIV/AIDS인권팀)
개인적으로 우여곡절도 많고 벌려 놓은 일도 많은 한 해를 보내고 있는데,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나의 시간 중 굉장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이 하나 있다. 무엇이냐 하면 연극 ‘크루즈’의 드라마터그이자 제작PD로, 연극을 준비하는 것이다.
드라마터그랑 제작PD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하자면, 드라마터그는 극의 외적인 관점에서 작품을 분석, 연구하고, 배우들을 포함한 제작진의 극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자문을 제공하며 자료 수집과 스터디 기획 등을 맡는다. 제작PD는 무대, 소품, 조명 등 파트의 예산 관리와 프로덕션 인원의 연습실 참여 일정 등 현장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연극은 고사하고 예체능 분야를 전공하거나 배운 적도 없을 뿐더러 예술 활동이나 연극에 참여한 경험도 없는 내가 어떻게 프로덕션에 합류했는가를 이야기하려면 대충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퀴어 커뮤니티에 나온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 우연한 기회로 연극을 전공하는 친구를 만났는데, 마침 나도 연극과 뮤지컬을 좋아하던 터라 금방 친해졌다. 퀴어 당사자가 만드는 퀴어 연극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그는 직접 퀴어 연극 연출을 맡아서 무대에 올리고 싶어했는데, 그때 선택한 극이 영국에서 2021년 초연을 올린 1인극 ‘크루즈’였다. 마침 영어 통번역으로 가끔 용돈 벌이를 하던 나에게 번역으로 참여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고, 그렇게 해서 연출, 번역가, 프로듀서, 배우 등의 팀이 당시 연출을 주축으로 꾸려졌다. 그런데 2024년 하반기 개막을 목표로 한창 준비하던 당시의 프로덕션은 첫 공연을 올리기 약 3주 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중단되었고, 프로덕션에 함께하던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후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학교를 졸업하고, 활동을 넓혀가고, 첫 직장에 들어갔다 퇴사했다. 2024년 프로덕션의 배우를 맡았던 친구는 프로덕션이 중단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대를 했다. 그 친구가 군복무를 하는 동안 간간히 연락이 닿았는데, 군대에서도 ‘크루즈’를 놓지 못해서 새로운 프로덕션을 준비하며 작업할 사무실을 구하고 극을 다시 번역하는 등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꾸린 새로운 팀에는 이전 프로덕션에 있었던 구성원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동안 HIV/AIDS 인권활동을 하며 해당 의제에 대해 많이 배우고 사람들을 교육하는 역량을 기른 점, 그리고 이전부터 극을 접해서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점 등을 들어 드라마터그로 합류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해서 올해 초부터 프로덕션에 다시 합류해 연극을 준비하고 있고, 다음 달인 10월 29일, 첫 공연을 앞두고 있다.
‘크루즈’는 앞서 말했든 2021년 영국에서 첫 공연을 올린 1인극이고, 1980년대 런던 소호의 게이 커뮤니티를 강타한 HIV/AIDS 위기를 주된 배경으로 한다. 영국에서 극작과 출연을 맡은 잭 홀든도 오픈리 퀴어 아티스트로, 성소수자 전화상담센터인 ‘스위치보드’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시절을 소재 삼아 작품을 썼다고 한다. 이번에 준비하는 ‘크루즈’에서는 2024년 당시에 배우를 맡을 예정이었던 친구가 연출로 프로덕션 전체를 총괄하고, 무대에 오를 배우들로 댄서 킹키와 연극배우 한민우를 섭외했다.
킹키 배우가 케이팝 씬과 대중매체에서 인지도가 높고, 한민우 배우가 대학로에 코어 팬층이 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더블캐스트로 나오는 퀴어 1인극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인지도가 높은 배우들이 참여한다는 점을 배제하더라도, 작품 자체가 너무 좋은 극이다. 그래서 이 연극을 올리는 데에 나 자신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평소에 퀴어 서사를 다루는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을 많이 좋아하고 자주 찾아보는데, 가끔씩 너무 아쉬운 작품이 있다. 극 자체가 퀴어의 서사를 납작하게 해석하거나, 정상성에서 벗어난 관점을 가져볼 생각을 하지 못했거나, 극이 좋아도 한국 공연에서의 연출과 해석이 아쉽기도 하다. ‘크루즈’를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이렇게 아쉽다고 느낄 만한 지점이 생길 여지를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퀴어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도와 감수성이 높은 인원들로 제작진을 구성했고, 성인지 감수성과 성소수자 이해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다. 또한 나는 드라마터그로서 작품의 맥락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여러 차례의 워크숍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내가 아무리 성소수자 당사자이고 HIV/AIDS 인권운동을 해도, 1980년대의 게이 커뮤니티에서 청년기를 보낸 적이 없기 때문에 배경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작품에 등장하는 런던 퀴어 업소들의 역사, 작중에 등장인물들이 부르는 노래, 그리고 1980년대 영국의 HIV/AIDS 위기와 성소수자 인권사에 대해 자세하게 조사하고, 워크숍에서 해당 내용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다. 워크숍을 진행하기 전에 배우들과 처음으로 인사하고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배우들이 1980년대 게이 커뮤니티에서 청년기를 보낸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행성인 HIV/AIDS인권팀의 이야기마당에서도 모신 적이 있는 감염인 커뮤니티 KNP+의 전 대표이신 손문수 님을 모시고 이야기 듣는 세션도 진행했다. 마지막 워크숍으로는 HIV/AIDS인권행동 알의 활동가들을 모시고 청년 감염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40년 전의 HIV/AIDS 위기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는 점을 확실히 인지시키면서도, 정부와 사회의 차별적 대우와 낙인이 큰 원인을 차지한 인재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동시에 감염인의 삶은 그 당시의 비극에서 끝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현재 HIV/AIDS인권운동의 큰 의제이기도 한 전파매개행위죄와 초국적 제약회사에 대한 이야기도 다뤘다.
사람들이 워크숍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고 이해했는지는 사실 확인할 방도가 없지만, 어쨌든 지금도 프로덕션은 잘 굴러가고 있는 것을 보면 기쁘고 설레기도 하면서, 내가 놓치는 것은 없는지 매번 불안하기도 하다. 이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여러 큰 채널을 통해서 연극을 홍보할 기회도 생기고, 주변의 지인과 친구들도 많은 관심을 주고 있다. 어찌 되었든 극 연구와 워크숍 준비를 무사히 진행하고 HIV/AIDS 의제나 극 내부에서 퀴어 서사에 대해 질문을 받을때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걸 보면, 활동에서 배우고 기른 것들을 이렇게 사용할 수 있는 게 만족스럽기도 하다.
지금 글을 쓰는 시점은 ‘크루즈’ 개막까지 딱 31일이 남았다. 배우들이 내일 있을 제작 발표회의 장면 시연을 준비하는 동안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많은 감정이 교차한다. 다른 것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연극에 관심을 가지고 보러 와 주면 정말 좋겠다. 다음 달의 웹진에서는 작품 내의 퀴어 서사, 그리고 HIV/AIDS 위기에 대해 극을 연구하며 내가 느끼고 배운 점들을 주제로 조금 더 자세한 글을 쓸 예정인데, 그 글을 기다리면서 티켓 한 장쯤 예매해주심 좋겠다.
연극 ‘크루즈’는 2026년 10월 29일부터 11월 8일까지, 대학로 씨어터쿰에서 한국 초연이자 아시아권 초연을 올린다. 티켓은 NOL(구 인터파크_클릭)에서 예매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