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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이달의 투쟁사업장] 아시아 빈민대회 컨퍼런스에 다녀와 투쟁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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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과 (행성인 성소수자노동권팀)

행성인 성소수자노동권팀은 올해 초부터 “이달의 투쟁사업장”을 정해 소소한 연대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매 달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소식들을 찾고, 각 투쟁사업장들의 쟁점과 요구를 학습하며, 성소수자 노동자의 이름으로 이들에게 연대한다는 인증샷을 촬영해 행성인 SNS에 업로드 해왔습니다. 8월부터 남은 하반기동안 노동권팀은 투쟁사업장 인터뷰, 카드뉴스 제작 등 다양한 방식의 연대를 넓히며 행성인 웹진에 투쟁사업장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옛 이야기

십 대 후반, 처음으로 저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정확히는 가난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현재는 고등학교 교육이 무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지금 삼십 대인 제가 십 대였던 당시에는 조금 달랐어요. 고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학비를 내야만 했고 당시 가계에는 그것이 꽤나 부담이었습니다. 분기에 한 번씩 내는 금액이고 당시 저렴한 보습학원 학원비와 같았지만 부담스럽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을 증명하며 학비를 면제 받아야 했습니다.

가난을 증명하는 과정은 이랬습니다. 일단 가난하다는 사실을 신청서로 작성해 제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청서를 증명하기 위해 각종 서류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가장 간편한 방법은 건강보험료를 얼마나 냈는지 서류를 떼어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서류를 가져가면 제 가난은 쉬이 인정받았습니다. 당시 제 양육자는 당시의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였으니까요. 그리고 4인 가구에서 임금 노동을 하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으니까요. 그렇게 가난의 증명은 시작됐습니다.

저와 가족은 우선돌봄 차상위계층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가난을 인정받은 계층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법 괜찮은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저와 동생은 대학에 다니던 시절 국가장학금을 지급받을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대학에는 가난한 학생을 위한 장학 제도가 잘 되어 있었어서 저는 학비를 내지 않는 대학 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시 집주인이 보증금을 올려주거나 아니면 나가라고 했습니다. 보증금을 올려주는 것은 어려워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가족 중 유일한 임금 노동자를 고려해서 멀리 이사를 할 수는 없었고 직장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 갔습니다. 이사 직후 동이 다르다고 차상위계층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지역 사회복지 관련 공무원들이 집에 다녀갔습니다. 10평대 반지하 방에서 4인가구가 거주하는 모습을 외부인에게 보여줘야 했습니다. 그래야 월세 지원도 받을 수 있고 학비 지원도 계속 받을 수 있고 급식비도 안 낼 수 있으니까요. 네, 그래야 우리는 기존의 삶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10년 전 저는 근로기준법 밖의 노동을 하는 노동자였습니다. 주말이면 시내 빵집에서 주말이면, 그러니까 일주일 중 이틀간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를 했습니다. 노동시간은 주 22시간, 매일 4시간 연속 근무가 두 번 이상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에 맞는 보수를 받지 못했고 휴게시간을 보장 받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식의 근로기준법과 맞지 않은 일자리를 한동안 전전했습니다. 당시엔 노동이 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잘 몰랐습니다. 여전히 모릅니다. 그저 알고 있는 것은 노동이 저를 가난으로부터 끄집어내 주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일을 할수록 병원비도 많이 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지난 10월 16일, 반차를 내고 아시아 빈민대회 컨퍼런스에 참석하러 명동 가톨릭회관에 갔습니다. 기분이 묘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겪은 일들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각각 다른 이유로 가난을 겪었는데 가난으로 인해 겪는 문제들은 사람마다 크게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해, 글 앞에 TMI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컨퍼런스에서 들은 이야기는 제가 앞서 풀어놓은 내용들과도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제 가난의 이유를 궁금해 했습니다. 왠지 양육자에게 그 이유가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매일 양육자가 창피했고 원망스러웠습니다. 가난의 명시적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양육자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사회 구조에서 찾지요. 그리고 그 구조는 노동과 차별의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가난은 노동에 직접 영향을 끼치고 가난한 사람들이 하는 노동은 다시 가난을 불러옵니다. 그래서일까요? 노동권팀 모임에서 빈민대회 컨퍼런스 소식이 공유되자마자 제가 가겠다고 먼저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겪은 가난은 양육자의 노동 환경 영향이 컸습니다.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자신의 소수자성으로 인해 양육자가 낮은 임금의 안 좋은 노동 환경에 처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는 다시 가족의 가난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저만 그랬을까요? 주변의 가난한 친구들도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친구의 양육자는 전단지를 나눠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으니까요. 가난은 근로기준법이 더 잘 보호하는 노동을 할 수 없게 하고, 그에게 주어진 노동과 그 노동에서 비롯된 소득으로 인해 더 가난해집니다. 바로 이런 지점이 노동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빈곤 이슈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예전에는 가난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먹을 수 있는 반찬이 없어 급식을 반가워했던 저는 제 영양 상태를 가능하면 숨겼습니다. 제가 사는 집에서 그것도 보일러에서 물이 샌다는 사실도 숨겼습니다. 솔직히 집에서는 언제나 곰팡이 냄새가 났고 그것이 밖에서 나는지 안 나는지 아주 예민하게 따졌습니다.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지금은…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반지하에서 살고 동생과 같은 방을 쓰고 있습니다. 매일 요를 깔고 정리해야 하는지라 매일 그 요를 함께 쓰는 동생과 침구 정리를 가지고 다퉜죠. (지금은 안 싸우고 그냥 적당히 역할을 분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환경을 그정도로 숨기지는 않습니다. 예전에 그런 삶을 살았다는 사실도 굳이 숨기지 않습니다. 왜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회 구조가 저를 가난하게 했기 때문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인지, 가난을 내면화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가난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연대를 통해 배우게 됐기 때문인지. 다른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알게 됐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아시아 빈민대회 컨퍼런스에서도 다양한 다른 사람들의 가난을 알 수 있었습니다. 컨퍼런스는 현재 반빈곤운동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주제로 삼아 세 세션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첫번째 세션은 ‘아시아의 사회보장 현실과 나아갈 길’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됐습니다. 일본, 필리핀, 홍콩, 대만, 한국 다섯 나라의 현행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두번째 세션의 제목은 ‘생명의 보루 소송으로 본 공공부조의 역할과 책임’이었습니다. 생명의 보루 소송은 일본의 사회보장제도가 갑작스레 개악됐을 때 그 개악으로 인해 생존권에 위협을 받은 사람들이 원고가 되어 진행된 소송입니다. 마지막 세션은 ‘아시아 현장의 목소리: 투쟁은 나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반빈곤운동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경험이 공유된 세션입니다.

직장에 다녀오느라 두번째 세션부터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의 보루 소송에 참여한 원고들이 서로 연대감을 느끼면서 자신의 자아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원고들은 자신이 가졌던 문제가 개인의 잘못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들려주었습니다. 관련하여 한국의 이슈로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자 제도에 관한 투쟁이 소개되었습니다.

마지막 세션에서는 홈리스의 경험, 쪽방 거주자의 경험, 탈시설 당사자의 경험 등을 이야기하고, 관련 활동가들이 활동동의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인상 깊게 들었던 발제 중 하나는 노점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거주하는 지역에 굉장히 많은 노점이 있었는데 환경을 개선한다고 지역자치단체에서 노점상을 정리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진행된 일이라 바로 당시에는 SNS에서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었죠. 그 사장님들은 지금 어쩌고 계실까요? 세션은 그 당시에 느꼈던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 생각보다 오래됐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줬습니다.

참석한 세션마다 가난을 경험한 사람들의 주체적인 모습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창피해야 한다고 여겨지던 것을 더이상 창피하지 않게 여기는 모습도 볼 수 있었죠. 제 이야기를 굳이 길게 쓴 것은 가난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마저 투쟁이 되는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제가 경험한 가난은 또 다른 소수자성과 연관돼 있기도 했으니까요. (물론 다른 소수자성에서 비롯되지 않은 가난의 경험이 공유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체에서 가난은 언제나 특정한 모습만 묘사합니다. 제가 사는 지역은 부유한 동네로 분류되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지역으로 출퇴근하고 그로 인한 교통체증도 익숙합니다. 선거 결과 지도도 분류의 지표가 됩니다. 정상성의 냄새가 많이 나는 아파트 단지 옆에는 여전히 주택들이 많이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 지역에서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쪽방촌, 모스크, 중국식품점 등을 볼 수 있고 지역 주민들끼리는 홈리스를 함부로 대한 공권력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지역 주민 중 일부는 동사무소에서 라면을 받아오고 오래된 여관의 달방에 거주합니다.

매체에 묘사되는 모습과 제가 보는 삶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다른 상황에서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결혼할 때가 됐는데 누굴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걱정 어린 말 같은 것들은 일상에서 겪는 무례들 아닐까요. 사실 차별이 나타내는 모습은 어느 영역에서든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이 소수자성이 다른 소수자성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소수자성이 노동 여건에 영향을 끼치기도 노동 여건이 소수자성에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컨퍼런스의 마지막 토론에서 토론자들은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계속해서 투쟁해 나가겠다고 다짐합니다. 그건 제가 하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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