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 (행성인 HIV/AIDS인권팀)
누가 슬퍼서 춤을 춰?
나는 클럽에서 춤추는 걸 좋아하는 퀴어다. 그리고 이 둘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춤이 어떤 것들의 해방구가 될 수 있다고도. 다만 해방이라는 말이 너무 무겁다면, 적어도 잠시 사회의 부름에 대해 도피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고는 말할 수 있다.
다들 클럽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헤테로들에겐 즉석 만남의 성지이고, 게이들에게는 끼 떨러 가는 곳이고, 레즈 클럽은 음… 싸이 노래가 나온다는 것 밖에 모른다. 여하간 하나 빼먹었다. 클럽은 춤추는 곳이다. 그것도 무자비하고 강력하게 추는 춤이어야 한다. 그 강력한 춤은 우리를 어딘가로 이끈다. 어디로 이끄냐고? 이제부터 설명한다.
클럽이라는 일종의 새벽기도회

다들 개신교의 새벽기도회를 가본 적이 있는가? 나는 목사 아들 게이라서 너무나 친숙한 상황이지만, 모르는 이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어머님들이 새벽에 밥 안쳐놓고 교회에 나와서, 부목사가(담임목사는 자야 한다) 주로 구약, 그것도 보통 욥기 – 부조리함을 다루는 성경의 파트 – 의 구절을 인용한 짧은 기도를 한 다음, “주여”를 크게 외치며 기도를 시작한다. 그리고선 어머님들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울고불며 방언을 하고 가슴을 치기도 하고 발을 동동 구른다. (이것을 어린 시절에 보고 큰 충격을 먹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주님께 용서받고자 한다. 거룩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함께. 그렇게 자신의 죄를 참회한 우리의 어머니들은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게 된다.
클럽도 별반 다르지 않다. 더러운 사회생활에 지친 나와 친구들은 클럽이라는 장소에 들어가 내 자신 구석구석 묻은 잔때들을 털어낸다. 강력한 소리에 뇌는 잠깐 마비된다. 현란한 비트에 몸은 떨린다. 그렇게 몸과 마음 사이에 틈이 생겼을 때, 내 자신의 속살은 드러난다. 그때가 내 속에 묻은 더러움을 털어낼 아주 좋은 기회다.
물론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새벽기도회의 어머님들은 어떤 내용을 향해 자기를 비운다. 죄의 고백이라는 내용, 주님의 용서라는 약속, 천국이라는 미래. 그러나 클럽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향하지 않는다. 비트는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빛은 어디로 인도하지 않으며, 땀은 어떤 약속도 갱신하지 않는다. 우리가 헌신하는 것은 비트와 연기와 분산되는 빛 그 자체이지, 그것들 너머에 있는 어떤 의미가 아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친 어머니들은 더 충실한 신자로, 더 헌신적인 아내로, 더 인내심 있는 노동자로 일상에 복귀한다. 그런데 무자비하고 강렬한 춤추기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거기서 풀려나오는 우리는 더 충실한 무엇도 되지 않는다. 잠시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만이 남는다.
생각이라는 감옥
우리의 마음이 생각을 자유롭게 한다고 여기지만, 생각은 사실 자유롭지 않다. 생각은 연속적이다. 과거의 생각이 지금의 생각을 지배하고, 지금의 생각이 미래의 생각을 결정한다. 그러니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몸을 지배하는 평소의 생활은 감옥에서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정해진 미래와 정해진 결말.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생각은 부름이다. 매 순간 누군가가 – 아마 사회가, 아마 내 안의 누구가 – 나를 부르고, 나는 그 부름에 응답해야만 내가 된다. “남자답게”, “정상적으로”, “이성애자로”, 또는 게이라 해도 “팔리는 몸으로”. 부름은 끊임없고, 응답은 의무다. 그렇게 매분 매초 부름에 응답하는 일을 우리는 “나로 사는 것”이라 부른다.
그러니 시스젠더 게이로서 내가 신체에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부름의 무게를 더 가시적으로 견디는 일이다. 매 순간 이 몸이 정말 내 몸인가, 이 욕망이 정말 내 욕망인가를 의심한다. 디스포리아는 자아가 부름에 의해 끊임없이 호출될 때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몸의 통증이다.
그런데 클럽의 아주 강렬한 사운드는 부름을 지연시킨다. 알딸딸한 알코올이 들어가고 적절한 분위기가 조성되면 몸은 붕 뜬다. 응답할 자가 사라지는 것이다. 부르는 소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지연되는 것이겠지만. 과거의 몸짓이 현재의 몸짓을 결정하지 않는다. (물론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과거의 몸짓을 기억하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리라.) 전에는 뚬바뚬바하다가 지금은 뚬칫뚬칫할 수 있다. 그 둘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의미 없는 몸짓은 역설적으로 잠시지만, 우리를 자유케 한다.
거기서 내 몸은 더 이상 “게이의 몸”이 아니다. “남성적인지 의심받는 몸”도 아니다. “팔리는 몸”도 아니다. 그냥 몸덩어리가 된다. 덩어리에는 디스포리아가 없다. 정확히는, 디스포리아를 느낄 내 자신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사라짐은 잠시이고, 내가 돌아오면 통증도 돌아온다
마음껏이 아니라 몸짓껏 모든 규칙과 불화하며 춤을 추는 나는 그제서야 나의 퀴어함을 조금씩 발견한다. 퀴어함이 모든 것을 규정지으려는 힘에 대한 저항을 의미할 때, 아무런 의미 없는 춤으로 그것을 내보이는 것이다. 퀴어함은 어떤 정체성이 아니라, 이름표-그것이 여자와 남자라는 성별일 수도 있고, 게이라는 정체성일 수도 있다-의 권위에 균열을 내는 모든 실천의 이름이다.
분열된 몸짓에서 오는 자유로움
일상에서 분열은 병이다. 통합되어 있어야 할 자아가 갈라져버린 상태. 치료해야 할 증상. 지금은 조현병이라 부르는 정신분열증처럼. 그러나 클럽에서 일어나는 분열은 다른 결을 가진다. 형식이 있는 분열이기 때문이다. 비트의 정확성이 있고, 박자의 반복이 있고, 빛의 패턴이 있다. 오직 순수히 형식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의 구조에 나를 맡긴다.
그래서인지 클럽에서의 분열은 아름다움이 된다. 분열을 회복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어떻게 조립하고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의 재료로 옮기는 것. 자아를 더 잘 모으려는 게 아니라, 자아를 어떻게 흩뜨릴 것인지가 살아짐의 질을 결정하게 되는 것.
분열된 몸짓은 각자가 각자 따로 움직인다. 통일된 내가 없이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사실 손과 발이라는 이름표로 지칭할 수조차 없는 몸의 부분들이 움직이는 그 경험은 여태껏 나의 몸은 이렇고 저래야 한다며 규정해온 것들을 하나하나 해체한다. 그러나 이 해체가 통합의 회복으로 향하는 건 아니다. 무조건적인 자유로 향하는 것도 아니다.
자유의 허망함
물론 어디까지나 이 경험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다. 다들 춤추며 자유를 늘 느낀다고 한다. 비트에 맞춰 흔드는 몸, 흩어지는 의식, 풀려나는 어깨. 그들에게 클럽은 즐거움의 장소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대부분 고통을 만난다. 정확히는, 나는 거기서 자유를 계속 만나지 않는다. 어쩌다 자유를 마주칠 뿐, 고통만이 가득하다. 음악이 아무리 커도 생각은 멈추지 않고 있다. 해체는 순간적이고 몇초가 지나면 다시 이어진다. 비트가 아무리 강해도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 사실이 어떤 다른 것을 데려온다. 처음 클럽에 들어서면 내가 나를 잊는 것처럼 느껴진다. 살들이 뒤엉키면서 어디까지가 나의 살인지 어디부터가 옆 사람의 살인지 흐려진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잊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정작 잊히는 것은 타인이다. 옆 사람의 살이 흐려지고, 그다음에는 옆 사람의 시선이 흐려지고, 그다음에는 사회가 부르던 그 이름들이 하나씩 흐려진다. 모든 타인이 지워진 자리에 가장 또렷해지는 것이 나 자신이다. 그것도 가장 적나라한 형태의 나 자신이. 결국 비트의 한가운데서 의식을 놓으려 해도, 수많은 살과 뒤엉켜도, 내가 만나는 것은 나 자신이다. 결국 클럽은 타인이 사라질 때 비로소 가시화되는 자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장소다.
가장 슬픈 몸짓
그렇게 클럽 안에서 어떤 순간이 온다. 비트는 너무 크고, 빛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게 사방으로 흩어지고, 내 몸은 더 이상 내가 움직이는 것 같지가 않고, 사람들이 구분될 수 없을 때. 나는 압도된다. 무엇에?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거대한 무언가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 거대함 안에는 의미도, 약속도, 메시지도 없다. 모두가 사라지고 나와 비트뿐이다. 그 텅 빔이 너무 거대해서, 그 안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비트를 멈출 수도 없고, 빛을 멈출 수도 없고, 내 몸이 한 점이 되어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매 순간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고 믿었던 내가, 응답할 자조차 사라진 자리에 서 있다.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깨달음은 슬프다. 내가 그동안 붙들고 있던 것이 사실은 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 심지어 춤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조차도 – 그래서 잡고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슬픔과 모든 설명이 거짓이라는 슬픔이 남는다. 그런데 그 슬픔 한가운데서 몸이 떨린다. 떨림은 슬픔 때문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는 얽힌다.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아름다움에 감긴다. 거기 말고는 감길 곳이 없다. 다른 모든 것은 환상이었기 때문이다. 환상이 아닌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환상이 잠시 풀리는 자리가 있을 뿐이다. 그 풀림에 감기는 순간, “진짜일지 모르는” 몸짓이 흐르기 시작한다.
마치 마더 엔딩의 김혜자처럼.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잃고 기억마저 침으로 지운 어머니가 관광버스 한가운데서 표정 없이 몸을 흔드는 그 장면. 영화 〈120BPM〉의 엔딩처럼, 친구들이 일주일 단위로 죽어가는 시대에 그래도 끝까지 클럽에서 춤추던 게이 청년들. 그들에게 춤은 즐거움이 아니었다. 응답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자리도 남지 않았기에 마지막으로 남은 형식이었다. 고통과 고난에 시달린 자에게 남는 건 몸짓이다. 그러나 그 몸짓이 있다. 떨고 있는 한, 우리는 무엇도 아닌 채로 살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