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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동의 레인보우패밀리] 육아#53.덕분에 망중한(忙中閑): 해변을 걷고 책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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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동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기획의 말
행성인의 오랜 회원인 여기동님이 필리핀에서 안부를 전합니다. 2015년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고 남편의 나라로 가서 살림을 꾸리는 여기동 님은 딸 ‘인보’를 입양하여 육아일기를 쓰고, 최근에는 성소수자 연구들을 리서치하며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모국의 산하는 노랗고 울긋불긋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 오고 있지요?

한가위 명절도 잘 보내셨는지요?

이번 추석에도 몇 가지 한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잡채와 새로운 레시피의 냉동 생선을 갈아서 동그랑땡을 부쳤습니다.

남편은 새로 배운 한국식 튀김을 만들었어요. 겉절이 김치에 곁들여 먹었더니 꿀맛입니다.

이번 명절에 한국인 이웃사촌을 초대하여 함께 먹습니다.

다들 바쁜 터라 명절에 얼굴도 보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면 좋더라고요.

해변 걷기

아이가 유치원에 등교를 하면 세 시간은 자유 시간입니다.

학교 앞에서 찰스 아빠는 일터로 향하고. 저는 해변 공원을 걷습니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를 마십니다.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들으며 걷습니다.

바다와 하늘 그리고 구름, 먼발치에 섬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마실 겸 걸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여유로워집니다.

학교로 돌아와, 나무 밑 벤치에서 스트레칭을 하면 밤 동안 굳었던 몸이 한결 시원해집니다.

도서관

딸내미 학생증(ID)을 도서관에 등록하였더니 출입이 가능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직원의 허락을 받고 여기저기 구경을 하면서 학부모도 이용할 수 있는지 문의했더니 가능하답니다.

혼자 있는 이 시간이 책을 읽고 공부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습니다. 마치 북극에 온 것처럼 실내가 에어컨으로 정말 시원해요. 핫스팟으로 와이파이와 전자정보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어 학술지의 접근과 열람도 가능하더라고요.

인상적인 공간을 두 곳 발견했습니다. 한 곳은 코너에 자리 잡고 있는 아메리칸 센터입니다(공식 명칭: 아메리칸 코너 두마게티, American Corner Dumaguete는 미국 정부와 실리만 대학교가 파트너십을 맺고 운영하는 무료 개방형 문화·정보 허브).

다른 한 곳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휴게 공간입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계단식으로 깔려 있고 큼직한 쿠션이 놓여있어요. 아이가 엎드리고 드러누워 뒹굴뒹굴 놉니다. 인보가 가장 좋아하는 곳입니다.

아이가 도서관을 가자고 제 손을 끄는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엘리베이터를 타면 너무 재미있어라 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말소리가 나오는 안내 방송이 신기한가 봅니다. 이 녀석 자기 혼자 엘리베이터를 탄다고 저 보고는 걸으라고 성화입니다.

비록 꼭 책만을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는 아이가 도서관에서 쉬고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그리고 필요한 공부도 하면 좋겠습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환경이 아이에게 즐거운 공간으로 느껴지길 바라는 마음이지요.

독서와 연구

도서관에 도착하면 아침 간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책을 꺼내지요. 요즘 법정 스님의 ‘스스로 행복하라’를 읽고 있습니다. 스님 말씀하시기를, “정신이 맑고 마음이 투명해야 자기 분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1]”. 그래서 제 마음에 ‘자아 경청(Self-listening)으로 정의하고 새겨 넣었습니다. 그리고 해변을 걸으며 다시 다듬어보았습니다. ‘나의 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여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근래에 의뢰받은 아동 환자를 위한 공부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도서관이 글을 쓰는데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과 장소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자폐스펙트럼장애와 ADHD를 갖고 있는 아이들을 검사하고 진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 결과를 보고서로 만들어 부모님에게 자녀의 상태를 설명해 드립니다. 더불어서 장애 아동을 키우는 부모님의 아프고 불안한 마음도 위로와 격려를 해드리지요. 이런 준비를 여기에서 하고 있어요.

아이의 하교를 기다리는 시간에 이렇게 좋은 환경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아이와 학교 덕분에 제가 호사(豪奢)를 누리며 하루를 보낼 수 있어서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아이는 등교하고, 찰스 씨는 (건강하게) 일하러 가고, 나도 이렇게 음악을 들으며 걷고 있네. 감당할 수 없는 큰 위기나 고통 없이 편안하게 하루를, 덕분에…’.

행성인 동지 여러분,

11월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달이지요?

그래서 다음 편지에 필리핀 트랜스젠더 이야기를 담아보려고 합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망중한으로 가을의 정취도 마음에 담으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천고마비 계절, 몸과 마음이 투명하고 맑은 10월 보내셔요.


[1] 법정. (2023). 스스로 행복하라. 샘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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