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 돌봄이 이 사회의 주요한 키워드가 된 지는 꽤 되었다. 성소수자 운동 안에서도 퀴어의 나이 듦과 돌봄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나 역시 최근 몇 달 동안 몇 번의 모임에 참여하고 관련된 책을 읽었다. 여기저기 아프다는 푸념과 ‘그러니까 우리도 모여야 해!’ 라는 바람 사이를 오가다 이야기들이 휘발되기 전에 그동안의 생각과 감상을 좀 남겨보려 한다. 쓰다 보면 조금은 정리된 이야기들이 다음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할머니를 잃었다는 슬픔만큼이나 요양원에서 떠나보냈다는 죄책감에 오래 시달렸다.
할머니가 막내 삼촌이 있는 김해로 이주할 무렵 나도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내 삶을 꾸려가는 동안 할머니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치매 증상도 점차 심해졌다. 나와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할머니를 집에서 계속 돌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때 월 몇십만 원을 내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로 놓여 있었다.
24시간 할머니 곁을 지키며 살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받아들이면서도 그 ‘어쩔 수 없음’ 때문에 나는 종종 무력했다. 과연 유일한 선택지였을까. 내 죄책감의 정체는 바로 이 질문의 도돌이표다. 서울에서 누리는 내 자유가 할머니의 희생 위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할머니가 요양원에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했다는 생각은 그런 마음을 더욱 부추겼다. 나도, 가족도, 요양원도 할머니에게 충분히 질문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왜 내가 기억하는 모습에서 점점 멀어졌는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비용과 서비스로 연결할 때, 그 자리에 사람과 관계에 대한 질문은 사라진다. 자본은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에는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지, 누구와 살아왔는지, 무엇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지 일일이 묻는 데에는 시간과 사람과 비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돌봄을 비용으로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우에노 지즈코의 <돌봄의 사회학>을 읽으면서 이 생각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저자는 오히려 돌봄이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온 이유 중 하나가 돌봄을 비용으로 환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돌봄은 오랫동안 윤리와 사랑, 헌신의 문제로 여겨져 왔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좋은 일이고, 돌봄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거나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도 익숙하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는 돌봄을 귀찮고 성가신 일로 느끼는 사람을 미성숙하거나 이기적인 사람으로 평가하기 쉽다. 특히 여성들에게 돌봄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주어져 왔다. 그로부터 돌봄은 무상일 때 사회적 가치가 높고, 유상일 때 사회적 가치가 낮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돌봄노동에 대한 가격이 낮게 책정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저자는 돌봄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보다 ‘어떤 맥락에서 어떤 행위가 돌봄이 되는가? 또 어떤 맥락에서 돌봄은 노동이 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돌봄에 대한 인권적 접근을 제안한다. 이는 돌봄에 대한 네 가지 권리 – 돌봄을 할 권리, 돌봄을 받을 권리, 돌봄을 하도록 강요받지 않을 권리, 돌봄을 받도록 강요받지 않을 권리 – 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이 네 가지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려면 돌봄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1
먼저 돌봄을 할 권리가 자기결정에 따른 선택이 되려면 돌봄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사회적 손실을 입지 않아야 한다. 돌봄을 하기로 선택하든 하지 않기로 선택하든 그 선택에 따른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돌봄을 선택한 사람들은 노동시장을 떠나거나 노동시간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 쉽다. 그 과정에서 소득과 경력이 단절되고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기도 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훌륭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정작 그 일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평생에 걸친 손실을 감수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돌봄을 선택한 데 따른 ‘돌봄 패널티’라 부른다.
반대로 돌봄을 하도록 강요받지 않을 권리는 어떨까. 돌봄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에게 실질적인 대안이 없다면 그 권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족이 직접 돌보지 않을 경우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나 제도가 충분하지 않다면 돌봄은 결국 가족 중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돌봄은 강요가 된다.
돌봄을 받을 권리와 돌봄을 받도록 강요받지 않을 권리 역시 중요하다. 돌봄을 받는 사람은 관계 안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놓이기 쉽다. 따라서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비대칭성을 완화할 장치가 필요하다. 저자는 그 방안으로 계약관계와 금전적 보수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돌봄에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은 단순히 서비스를 구매하는 일이 아니라 돌봄 관계를 보다 대등하게 만드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빨간 손톱에서 시작된 물음은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이 질문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왜 나는, 또 우리는 그 질문을 포기하게 되었을까.
가족은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고 돌봄노동자는 정해진 시간 안에 여러 사람을 돌봐야 한다. 시설은 한 사람의 삶보다 정해진 서비스와 운영 방식에 따라 움직이기 쉽다. 이성혼 중심의 제도에서 누군가의 관계는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적 낙인에 취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드러내기조차 어렵다. 어떤 이들에게 질문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질문받는 것 자체가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우에노 지즈코가 제시한 돌봄의 네 가지 권리를 떠올리면 이 모든 상황은 결국 그 권리들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누군가는 돌봄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하고 누군가는 돌봄을 거부할 수 있는 대안을 갖지 못한다. 또 누군가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돌봄받지 못하거나 원하지 않는 돌봄을 거절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질문할 여유가 없고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설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현실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삶을 세세하게 살피는 데에는 시간과 사람과 비용이 필요하다. 돌봄노동자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일할 수 있어야 하고 가족이 생계를 포기하지 않고도 돌봄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돌봄받는 사람 역시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과 관계를 존중받고 원하지 않는 돌봄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권리들을 실현할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어야 비로소 서로의 삶을 묻고 존중하는 돌봄도 가능해질 것이다.
사회복지사가 군인만큼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돌봄과 사회복지가 우리 사회에서 익숙한 이야기가 된 시대다. 돌봄이 사회적 과제로 떠오르면서 관련 서비스와 제도도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서비스의 양이 늘어나는 만큼 돌봄의 질도 달라지고 있을까. 우리가 돌봄에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비용을 어디에,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이다.
나는 돌봄을 비용으로 계산하는 것이 사람과 관계를 지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사람과 관계를 지키기 위해 돌봄에 필요한 시간과 노동, 비용을 제대로 계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여기서 돌봄의 공공성을 떠올리게 된다. 자본은 스스로 질문하지 않는다. 무엇을 물을 것인지, 누구의 삶을 살필 것인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돌봄의 공공성은 그 질문의 방향을 비용의 절감이 아니라 사람의 삶으로 돌려놓는 일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고 돌봄이 필요한 사람 역시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제도가 익숙하게 상정하는 관계 밖의 이들과 드러나지 않는 이들의 삶도 돌봄 안에서 존중받도록 하는 것. 공공성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던 돌봄 안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최소한의 기반이 되어줄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생각들이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셨던 죄책감을 덜어주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그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되묻곤 한다. 다만 이제는 그 질문을 나와 가족의 선택에만 가두지 않으려 한다. 할머니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있었는지, 우리 가족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주어졌는지, 그리고 그 선택지를 누가 마련해야 했는지를 함께 묻고 싶다.
어쩔 수 없다는 말 대신, 다른 선택이 가능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질문하려 한다.
- 『돌봄의 사회학』, 오월의 봄, 우에노 지즈코, 91p~102p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