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옹 (행성인 트랜스젠더인권팀)
| 매년 7월 14일은 국제 논바이너리 가시화의 날입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트랜스젠더퀴어인권팀에서는 논바이너리 가시화의 날을 기념하며 올해 논바이너리의 트랜지션을 다룬 특집 웹진을 기획했습니다. 7월부터 10월까지 한 달에 한 편씩 총 4명의 필자가 메인 주제인 ‘논바이너리의 트랜지션’에 더하여 각자의 생각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글을 연재합니다. |
젠더 표현하기?
상담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에서 시작해보자. 가슴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평평한 가슴이 너무 부럽다는 이야기를 했다. 상담 선생님이 ‘바인더’라는 것을 추천해 주었다. FTM 분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고, 레즈비언 부치들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 대신 8시간 이상 사용하면 많이 불편할 것이라고도 덧붙이셨다. 가슴의 모양을 아래로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위치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자세한 것은 유튜브에도 있으니 꼭 찾아보라고. ‘바인더’를 착용하는 것에서 자신만의 젠더 표현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눈을 반짝였다. 신세계를 만난 느낌이었다.
바인더 찾아 삼만리
바인더는 가슴을 압박하는 속옷같은 장치다. 후크형, 지퍼형, 벨크로형… 굉장히 많은 종류가 있다. 후크형은 옆구리 쪽에 후크가 달려서 단계적으로 압박할 수 있다. 지퍼형의 경우, 주로 가슴 께에 지퍼가 달려 있다. 벨크로형은 옆구리 쪽에 찍찍이 같은 것이 달려 있다.
개인적으로 탈착은 지퍼형이 좋았지만 효과는 후크형이 좀 더 좋았다. 가슴을 단계적으로 압박하면서 더 납작해 보일 수 있다는 점이 후크형이 가진 장점 같았다. 밸크로형은 아무리 생각해도 장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몽땅 사놓고 두 달을 채 못 입었다. 일단 가슴 압박이 생각보다 많이 된다. 그래서 숨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는 흉통도, 가슴도 큰 체형이라 나에게 맞는 바인더를 찾기가 어려웠다. 겨우 찾았는데도 그 모양이었다. 나중에는 지퍼형을 많이 썼는데 영 내가 원하는 결과를 못 가져다줘서 포기했다.
대안할 수 있는 것들 안에서
바인더는 드라마틱하게 가슴을 없애는 효과가 있었지만 피부 트러블, 가슴 압박으로 인한 숨 참 등과 같은 여러 부작용들이 내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스포츠 브라나 미니마이저 브라를 찾아 헤맸다. 미니마이저 브라는 가슴을 예쁘게 작아 보이게 해서 옷 핏을 살리는 용도였다. 결과는 대실패.
옷핏이 예쁘게 보이는 건 원하는 평평한 가슴을 가지는 게 아니었다. 나머지 스포츠 브라는 쏘쏘였다.
가슴이 작게 보이는 용도로 괜찮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용인할 수 있는 평평한 가슴을 가지게 한 것 같았다. 지금도 계속해서 대안을 찾고 있다. 브라탑이 있어서 그걸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 그래도 겉으로 보이는 건 여자의 몸이니까 그런 점에선 실패했다. 원하는 건 하나다. 평평한 가슴…
평평한 가슴에서 벗어나기
트랜스 테이프 같은 것들도 있다. 의료용 테이프인데 몸 바깥쪽을 향해 붙인다. 그러면 훨씬 가슴이 작아 보인다. 직접 착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매우 만족도가 높은 것처럼 보였다. 살이 있다면 존재할 거 같은 가슴처럼 보였다. 사실 살이 있거나 근육이 있다면 약한 굴곡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평평한 가슴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
평평한 가슴일 때의 나도 존재했다(!). 느리게 발달한 2차 성징은 독이 된 것만 같았다. 당시 여성을 수행하고 있던 나에게 브래지어는 당연한 것이었고, 부푼 가슴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살아야만 여성인 줄 알았던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퀘스처너리를 거칠 때, 약하게 인지했다. 이것 참 불편하다고. 논바이너리로 정체화 할 때 깨달았다. “이런 몸을 가진 내가 싫다. 특히 평평한 가슴이 아닌 내가 싫다.” 이 때부터 시작된 거 같다. 평평한 가슴에 대한 집착이. 평평한 가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친구조차 없었다. 평평한 가슴에 대한 집착을 누구와도 나누지 못한 채로 고민만 커져 갔다. (그래서 나온 말이지만… 논바이너리끼리 모여서 바인더든 뭐든 툭 터놓고 이야기 좀 하고 싶다.)
논바이너리인 어떤 분께서도 “탑 수술”을 입에 달고 사는 분이 있었다. 탑 수술만 하면, 탑 수술을 하고 싶다… 짐작컨대 여성으로 패싱되는 사유가 탑에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평평한 가슴만 가진다면 여성 외의 젠더로 패싱되지 않을까. 특히나 가슴이 성적인 부위로 읽히는만큼 신경이 쓰인다.
군더더기 살 없는 가슴, 큰 움직임에도 미동이 없는 가슴, 납작하고 아름다운 가슴. 나에게 없는 가슴. 가짜로 만들어야만 하는 가슴. 두 달 남짓한 그 시간동안 사람들을 속이는 것도 재밌었다. 사실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을 테지만.
논바이너리의 트랜지션
가슴이 평평한 것에 집착을 걷어 내니 여유가 생겼다. 물론 언젠가 탑 수술을 할 수 있고, 탑 수술을 통해 젠더를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 평평한 가슴이 갖고 싶을 때 바인더를 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땐 브라탑을 입는다. 그렇기 때문에 패싱은 여전히 여자로 되겠지만, 가슴이 있던 없던 간에 내 젠더는 내가 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젠더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뭔가에 가깝다. 0이 남성, 1이 여성이라면, -7, 22과 같다고 해야 하나? 젠더 표현에서도 그것이 드러난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런거. 단, 남성적인 어떤 것도 갖고 싶지 않아 남성적인 것은 제외하는 편이다.
논바이너리가 의료적 트랜지션없이도 젠더 표현을 하는 것이 바인더만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때로 옷을 입는 것도 젠더 표현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겠다. 어떨 땐 중성적인 옷을 입는다. 어떨땐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꾸민다. 그러고 나서도 결국 여성 패싱을 당하는 건 어쩐지 찜찜한 일이지만, 내 젠더는 내가 정하니까!(이건 소수윗의 노래에서도 나온 가사)
타인이 몸이 어떻고, 하고 다니는 게 어떤지에 따라 젠더를 정한다는 건 위험한 생각이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해왔다면 그렇지 않은 가능성에도 생각해보라. 어쩐지 남자 일 것 같고 여자 일 것 같은, 그러나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런 것들이 모여 논바이너리를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