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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에세이] 2026 상반기 아트워싱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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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웅 (행성인,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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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할 것은, 해당 원고가 퀴어를 주요 키워드로 삼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올 상반기 동안 열린 유수의 퀴어 미술 전시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행성인 웹진에 쓰는 것은 지금의 퀴어 운동만큼이나 예술씬에도 초국적 자본의 개입이나 일종의 ‘워싱’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0519 퐁피두 한화 집단학살 아트워싱 즉각 중단하라 규탄행동 (출처: 검열에반대하는예술인연대)

상반기동안 퐁피두센터 한화 아트워싱 규탄행동이 있었다. 이를 두고 이래저래 의견을 얹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여기서 하나씩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사안을 다루는 미술 언론의 태도는 가시처럼 느껴졌다. 

8월호 《월간미술》에는 ‘前 기자, 미술사학’이라는 바이라인을 달고 있는 저자가 “초국가시대의 아트워싱”이라는 제목으로 규탄행동에 촌평을 남겼다. 그는 한화가 방산기업으로서 전쟁에 자유롭지 않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예술가들이 왜 이제서야 비판하는가를 문제삼는다. 싸울 거면 한화가 퐁피두와 양해각서를 썼던 수년 전부터 비판해야 했던 거 아니냐는 내용이다. 예술계 투쟁을 뒷북으로 평가하고 싶은 건지, 그 투쟁이 정당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아마 둘 다를 노렸을 거다.

사회 운동의 목적 중 하나는 이해 관계자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사안을 알리며 변화의 공감대를 넓히는 것이다. 문제 제기에 적확한 시점이 설령 있다고 해도 누구라도 중간에 참여하거나 운동을 만들 수 있고, 문제라고 인식한 순간부터 투쟁은 시작한다. 운동에 타이밍을 따지다니. 적확한 시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주어를 바꿔서 미술사만 봐도 그런 게 항상 있지는 않으며 나무랄 일도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것이다.

외려 때늦은 문제 제기라고 채근하는 건 운동 사회에서도 교조적이라고 경계하는 태도다. 오히려 지금 이러한 운동이 만들어지고 비판하는 이들이 많아지는가에 주목해야 하지 않나. 성소수자 운동 하면서 백날 천날 시의 적절하게 권리를 외치고 변화를 요구해도 시기상조고 나중에 얘기하란 말을 인이 박히도록 들어온지라 이런 핀잔이 얼마나 우습고 허울 뿐인가 싶다. 예술인의 투쟁을 일종의 냄비 근성처럼 묘사하지만, 2023년 10월 이후의 학살 시점부터, 아니면 한화와 퐁피두의 양해각서 보도 시점부터 비판했다고 해도 당신은 시의 적절한 투쟁이라고 부르며 수긍하지 않았을 거다. 이스라엘 건국부터 팔레스타인 지배와 식민화가 시작된 1948년부터 비판했다고 해도 쓴이는 비판의 부당함을 어떻게든 꼬리 물지 않았을까. 

그도 그럴 것이 글쓴이는 SNS에 소신 발언이라고 남기면서 하마스의 민간인 선제 공격을 이야기하고 팔레스타인과 하마스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라는 지점을 말한다. 오류를 바로잡기에 앞서, 그의 주장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점하고 국가로 삼은 때부터 시작한 식민화의 역사를 간과한다. 근 몇 년 간 팔레스타인 민중을 ‘인간 동물’이라 부르며 오랜 시간 이동과 거주를 통제하고 불구화하며 이제는 절멸을 일상화하려는 현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기도 하다.

그간 띄엄띄엄 참여해 온 지라 부족함을 고백하며 운을 떼자면, 팔레스타인 운동은 이스라엘이 가자를 파괴하고 의도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사정을 사회에 알리며 팔레스타인 민중의 부당한 죽음과 절멸을 여기에 잇는다. 동시에 그런 상황에도 서로를 살피고 즐거움을 찾는 삶들을 필사적으로 읽어냄으로써 이러한 연결이 공동의 삶을 지속케 하는 계기일 수 있음을 지속적으로 알린다. 격주로 집회를 열고 토론회든 레이브든 열면서 자율적인 언어와 장소를, 집회의 형식과 대중을 만들고 기업이 어떻게 이스라엘과 협력하여 학살에 앞서는지 좇는다. 정부가 국제사회에 평화를 운운하면서도 어떻게 군/산 협력을 하는지, 파괴와 점령을 침묵하고 방기하는 기만을 부리는지 감시한다. 여기에는 당연히 활동가 뿐 아니라 예술인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시민들이 참여한다. 구조적 착취와 식민지배가 지속하는 지금, 운동의 적정 타이밍보다 여전히 장기화되며 긴급함이 일상이 되어가는 상황을 직시하는 것이다. 

무시하고 지나쳐도 될 작은 기사에 이렇게 버튼이 눌려 문제 삼은 것은 해당 원고가 주류 미술 잡지에 실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잡지사 데스크가 이런 글을 실으면서 쓴이와 어떤 이견과 의견을 나눴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렇게 글을 낸다면 최소한 반론의 지면도 마련해야 하지 않나. 1세계 미술관을 유치하며 문화적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방산 기업의 문제를, 1세계 아방가르드가 제국주의에 어떻게 편승하거나 저항했는가를 예술형식으로 보이고 있는가를 더불어 이야기 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해당 기사가 아니어도, 많은 미술계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의견을 올리고 다시 내렸다. (좋건 싫건 많은 의견들은 그간의 집단 항의와 투쟁의 효과다. 이렇게 안 싸웠으면 관심 안 줬을 거잖아.) 말을 얹는 것들 중에서 또 하나 짚어야 할 반론은 예술가들이 기금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미술 시장은 기업의 후원이 없으면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회의다. 죄 없는 자만 돌을 들라는 문장은 싸우는 이의 자격부터 의심한다. 그들은 묻는다. 당신들이 받아온 기금의 출처는 깨끗한가. 기금에 자유롭지 않은 예술인은 순수하게 싸울 자격이 있는가. 여기서 선을 좀 더 넘으면 이렇게도 얘기한다 –  지금 이렇게 이름 얹는 거, 명분에 편승하고 투쟁의 순수성을 이용하는 거 아닌가.

미술관 오픈 시점에 규탄행동을 하는 건 다분히 다른 목적이 있는 거 아니냐는 질문인데, ‘순수한 투쟁’을 이야기하는 건 어디서 많이 들은 익숙한 레토릭이다. 문제 제기하는 누군가를 비아냥거리고 그의 도덕적 순결함을 이야기하는 건, 사상의 순결과 예술의 자율성이 조금이라도 흠결이 생기면 안 된다는 주장을 전제한다. 자율성은 스스로의 의심도 하지 않고, 오염될 수 없다는 주장 만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들 중 몇몇이 운동의 순수성을 뒷받침하는 예시로 ‘비건’을 들었다. 설령 비건 운동을 존중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당신이 비건 운동에 설득되고 감화되었기보다 운동의 순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것 아닌가. 순수한 운동의 표본으로 비건을 언급하는 것이야말로 해당 운동을 도덕주의적 프레임에 가두는 것 아닌가.) 

운동의 주체는 어느 정도 제도와 관습에 체화되어 있고, 자본 시장의 우산 아래 생존하면서도 음지를 더듬으며 다른 세상을 그려낸다. 운동을 예술로 바꿔 다시 써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싸우는 이의 무결함을 따지기에 앞서 무엇이 문제인지 계속해서 묻고 내 안의 모순까지도 인지하는 일이다. 운동은 그 안에 조율과 협상을 통해 나와 주변으로부터 변화를 일구는 일부터 시작한다. 내가 지금의 체제에 이미 연루되어 있음을 알아채고, 그로부터 시행착오가 있고 오류가 있을지라도 문제 제기의 방식을 세공하는 것이다. 하여 그로부터 내가 창작하고 살아가는 양식도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1의 보충

근간의 미술 저널들이 음이든 양이든 퐁피두 한화의 개관 소식을 다뤘다. 또 다른 미술잡지《아트인컬처》 7월호에는 전영백 교수가 퐁피두 한화의 설립 의의와 전시 취지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그의 원고는 기념비적인 미술 공간으로 한화 퐁피두를 상찬하기보다 개관전인 〈큐비스트: 시각의 혁신가들〉을 리뷰하며 미술사적 관점을 세공한다. 글은 큐비즘 미술이 어떤 배경에서 조형 언어를 만들어냈는지, 그것이 한국에서는 어떻게 전래되어 실천 되어 왔는지 살피며 당대 파리의 산업화와 기술, 대중문화의 속도에 시각예술이 응한 궤적이 동시대 이미지 과잉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침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미술사에 기반한 면밀한 접근은, 하지만 동시대를 단순히 ‘이미지 과잉’으로만 설정하며 다소 단편적인 시각으로 지금의 문제 제기들이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막는다. (하필 나는 같은 호 잡지에 이시마 작가와 듀킴 작가의 전시 리뷰를 썼다. 온전하지 못한 이가 역시 불온한 애도를 할 수밖에 없는 일에 대해서, 그것을 변태적인 무대와 조형으로 남기고, 무대와 조형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펼쳐내는 작업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룬 글이었는데, 해당 글이 나란히 실린 구성은 어떤 아득함을 느끼게 했다.)

같은 잡지 8월호에는 노해(김소영) 작가/연구자/활동가의 “예술은 ‘세탁기’가 아니다” 칼럼이 실렸다. 쓴이는 기업과 민간자본이 예술과 문화 산업에 기여하는 개념으로서 메세나의 함정을 짚으며 기업과 사회의 책임을 묻는다. 잡지는 지난 호의 기획을 보충하는 듯 보였지만, 해당 원고는 아트워싱을 반대하는 이들이 무엇 때문에 반대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보다 퐁피두센터에 사회비판적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경우를 들며 불편한 읽기를 가능케 하는 미술관의 공공성을 재고한다. 하지만 그러한 예술 기관과 기업의 역할을 논하기 위해서는, 전시 공간과 작업을 지원하는 기업과 기관들이 비판적 예술을 품는 넓은 아량을 샤라웃 할 게 아니라 그들이 비판적 예술을 품을 자격이 있는지, 이러한 방식으로 제 책임을 면피하는 것은 아닌가부터 따져 물어야만 한다.

미술씬이 점잖게 ‘아트워싱’을 개념어의 수준으로 소개하며 주요한 주어로 쓰는 선택은, 팔레스타인 학살에 기여하는 방산 기업과 다른 기업들을 같은 무게로 호명하고, 이스라엘의 학살과 파괴에 기반한 정착식민주의를 다른 국가들의 전쟁과 분쟁에 동등하게 설명한다. 이른바 현실을 균질화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생략한다. 의도적인 흐린눈일까.  

2

최근에는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관이 타이완 파빌리온의 국가명을 지우고 기관명으로 변경하는 일이 있었다. 광주비엔날레 조직위는 그것이 행정상 기관으로 등록한 것이라고 해명하지만, 이미 대만 언론뿐 아니라 대만의 문화부가 애초 대만관으로 등록했다고 광주비엔날레의 검열을 문제삼는다. 

문제가 수면에 오르자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는 행정의 문제라고 일축한다. 행정상 국가관을 등록하려면 당국 대사관이나 문화부의 승인 공문이 있어야 하며, 국립대만미술관과 소통해왔기에 기관명으로 등록했다고 적는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기엔 이미 대만 정부부처가 입장을 내면서 검열 너머 외교적 공방으로 비화 되는 모습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대만 미술가와 큐레이터가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고, 광주 지역의 예술인들과 지역 인문사회 및 예술서점인 소년의 서, 검열에 반대하는 예술인 연대 등이 성명을 내고 목소리 내면서 최근에야 대만 파빌리온으로 이름을 수정하게 되었다. 다행이지만, 이렇게 긴 시간 불필요한 공방을 만든 광주비엔날레의 문제를 지나칠 수 없다.

28일 kbc 광주방송에 출현한 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는 ‘국가관, 기관관 나누는 일이 큰 의미는 없다’고 말하지만, 대표이사의 위치에서 그렇게 편의적으로 얘기할 문제인가 싶다. 겉으로 보기에 광주비엔날레는 국가와 기관 파빌리온을 균등한 카테고리처럼 구성한 것처럼 홍보한다. 하지만 이는 민간과 공공의 자유로운 선택을 제공하기보다 국가와 일개 기관 사이 위계와 인식에 기반한 농단을 부릴 여지를 남긴다. 단적으로 지난 비엔날레에 이스라엘관을 CDA 홀란재단이라는 이름으로 참여시킨 것에 대해 시민사회가 팔레스타인 파괴와 식민지화한 국가의 참여를 규탄한데 대해 비엔날레가 보인 입장은 사과와 시정이 아니었다. 이번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문제가 있거나 논쟁이 있는 국가는 기관의 이름으로 숨기고 행태를 반복했다. ‘소년의 서’에서 낸 입장문 “국립대만미술관(NTMoFA) 파빌리온의 명칭 사용에 대한 광주비엔날에의 입장(2026년 8월 20일 발표)에 대한 소년의서의 질문과 의견”의 통렬한 지적처럼 이러한 태도는 “‘국가’의 경계를 예술로서 새롭게 생각하거나 질문”하기는 커녕, 근대 국가의 배타적인 위계와 경계를 재생산한다. 여전히 참여국 정부 부처가 문제 제기하는데도 바꾸지 않고 해명처럼 입장을 낸 것은 그러한 의심을 키운다. 

계약상 문제라고 주장해도, 해당 국가가 시정을 요구하면 과정을 살피고 사과하고 수정하는 것이 상식적인 태도다. 하지만 주최측은 투명하게 밝히거나 시정하지 않으면서 어떤 정치적 계산과 협상이 있었는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었다. 메인 포스터 국가관 리스트에 ‘차이나’가 있는 건 심증을 키웠다. 이미 수년 전 광주 지역에서 대만 인사의 강의와 행사 참여 등에 대해 중국 대사관의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나, 최근 한국에서 전자입국신고서에 중국(대만)으로 표기를 바꾼 상황은 이러한 정황을 하나로 잇게 만든다. 불통의 상황에서는 어떤 비판도 음모론으로 전락한다. 그마저도 최근 ‘대만관’으로 명칭을 변경한 이후 중국측이 유감을 표하고 중국관 작품 설치를 중단한 상황은 그간의 혐의와 의심을 더 이상 심증으로 남기거나 음모론으로 일축할 수도 없는 모양새로 만든다. 물론 이러한 사태의 주요 원인과 책임은 민중항쟁의 역사와 가치를 제고하지 못하고 소통 없이 눈치 보며 편의적으로 행정을 처리해온 주최측의 책임이 크다.

하나 당부하는 건, 그저 계약과 행정상의 문제만 언급하며 어떤 반성도 변화도 보이지 않는 태도는 국제 행사로의 야망을 가지면서도 국제사회의 가치를 받아 안기는 커녕 외교적 무능함은 물론 내부 의사결정과정과 운영 구조의 부실함을 노출할 수 있음을 알면 좋겠다. ‘검열에 반대하는 예술인연대’가 발표한 성명서 “누가 ‘Taiwan Pavilion’이라는 이름을 두려워하는가”에서 지적하듯,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는《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지만, 그간의 태도는 변화를 제안하는 주체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 사태는 검열 행위가 국가 간 권력 관계, 국가와 민간 사이의 위계를 재생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문제 제기를 통해 문제를 수정할 수 있음을 또한 보여준다. 바람이 있다면, 지금의 문제 제기 뿐 아니라 근대 국가의 이름으로 자신을 명명하는 방식에 대해 생산적인 논의를 나누는 것이다. 국가가 갖는 부정할 수 없는 권력과 정체성을 품으면서도, 그에 대해 비판적인 재해석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 비엔날레가 국가 간 칼싸움보다 중요한 가치와 추구해야 하는 연결성과 관계에 대해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제시하는 장이 되면 좋겠다.

얼마 전, 동료들이 재밌는 포스터라면서 보여준 게 있었다. 이태원 모 클럽에서 고고보이 쇼를 홍보하는 포스터다. 중국과 대만 고고보이를 한명씩 불렀다. 차이나와 타이베이가 나란히 적혀 있는 걸 보면서, 이건 또 다른 양안 대리전 아니냐고 농담했는데(하필 주제가 밀리터리다. 의도한 거겠지 음흉한 K게이들), 지금 다시 보니까 차라리 두 분쟁국 고고보이한테 군복 입혀 놓고 포스터에 나란히 붙여 놓은 기개는 투명하기라도 하지 않았나 싶다. 

출처: 퍼플릭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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